아버지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으면서 나의 생활도 안정을 찾았다. 집을 떠나 멀리에서 생활하며 틈틈이 휴가를 통해 아버지를 볼 수 있었다. 아버지는 병원 생활을 하면서 칭찬상자에 병원 간호사분들을 많이 써넣으셨다고 한다.
병원에 오래 있다 보니 가끔은 병원에 방장 역할을 하면서 간호사를 도와주시곤 했다고 한다. 내가 병원에 면회를 갔을 때 간호사분들께 감사인사를 전했었다.
어렵게 결혼을 하고 장기복무에 선발이 되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첫째 아들이 태어나고 나는 진급을 위해 많은 노력을 쏟고 있을 때였다. 해안작전에 투입되어 출퇴근 없이 9개월을 해안중대장으로 복무하였으며 아내는 아들을 혼자 돌보며 내가 안전하게 임무수행 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해줬다.
아들이 3살쯤 되었을 때 나는 군에서 하는 신체검사를 받고 체력 검정을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신체검사를 했던 병원에서 전화가 와서 시간을 내서 꼭 정밀검사를 받아봐야 될 것 같다고 했다. X-RAY 상 심장 위에 있으면 안 되는 확인한된 무언가가 있다고 했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신신당부를 해서 느낌이 좋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병원 가는 걸 좋아하지 않아 그냥 넘겼을 텐데 전화해주시분이 꼭 진료를 받아 봐야 된다고 여러 번 얘기해서 간호사로 일하는 아내와 상의를 했다. 해당 병원에서 먼저 진료를 보자고 해서 나는 아내가 일하는 병원에 갔다. 병원장이 직접 진료를 봐줬고 여러모로 상태를 확인하고는 나가있으라고 했다.
병원장과 아내와의 대화가 길어졌고 느낌은 더 안 좋았고 찝찝했다.
"의사가 뭐래? 내가 큰 병에 걸린 거야? 암이야?
나는 그냥 별거 아닐 것 같아서 물었는데
아내는 대꾸를 하지 않았고 괜찮을 거라고 했다. 그러고는 큰 병원에 진료를 보기 위해 이리저리 진료 문의를 했다.
나는 군인으로 일하고 있어 군 병원을 가기 위해 진료 안내 전화를 했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증세로는 진료를 볼 수 있는 의사가 없다고 했다. 군의관 중에는 아무래도 해결하기가 어려운 질병 정도로 생각했다.
강릉대학교 병원에 진료를 보러 먼저 갔었는데 의사가 잘 알아듣지 못하는 내용으로 빨리 수술을 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흉성종이 의심된다고 했고 개복 수술을 해야 될 것 같다고 했다. 의학용어를 섞어서 이야기했기에 나는 못 알아들었지만 가족이 걱정되어 수술날짜를 최대한 빨리 잡아달라고 했다. 왜 이리 쉽게 정하냐고 병원에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더 큰 병원에 알아보겠다고 아내가 이야기했다. 그러곤 서울대학교 병원에 진료를 볼 수 있도록 아내가 일하는 병원에서 추천서를 받아 예약을 했다. 서울대학교 병원에서는 흉강경 수술을 통해서 제거가 가능할 것 같다고 했고 병원에 수술 예약을 잡을 수 있었다.
수술 날짜가 잡히고 머리가 많이 복잡했다. 흉성종이 어떤 병인지도 몰랐으며 네이버에 흉선암 카페에는 정보 공유를 위해 약 2000명 정도 회원이 있었다. 다들 희귀 암으로 많은 정보들이 없다 보니 답답해했었다.
아내는 아들을 한번 보고 나를 한번 보고 울면서 많이 힘든데 내색을 하지 않으려 했다.
나중에 물어보니 혹시나 잘못돼서 아빠가 없을 때 아들에게 아빠가 없는 걸 이해시키는 게 힘들 것 같아서 많은 걱정을 했다고 한다. 수술 전날 장모님이 올라오셔서 아들을 돌봐주고 나는 아내와 함께 수술을 받으러 서울로 갔다. 서울대학교 병원에는 많은 환자, 환우들이 있었다. 모자를 쓰고 계시는 분들, 어린 꼬마아이들, 환자들이 엄청 많았다. 내가 수술하고자 검사를 받고 있을 때 많은 환자들이 수술을 받고 퇴원하고 또 많은 환자들이 다시 수술을 위해 병실에 왔었다.
그때 며칠은 내가 살아왔던 인생을 돌아보게 하는 시간이었다. 어릴 때부터 수술하기까지 인생이 머릿속에 스쳐갔다. 그런데 두려움은 없었다. 막상 수술을 받겠다고 하니 수술이 잘돼서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잘 살 수 있게만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들을 낳고 아들만 낳아놓고 무책임하게 떠나버리는 남편이 되지 않도록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었다. 아내가 불쌍하고 안타까웠고 나는 많이 미안했다. 원인도 모르고 왜 아픈지도 모르는데 자칫 잘못하면 죽을 수 도 있다고 하니 어린 나이에 남편이 없고 아들만 있는 삶을 살 수도 있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내에게 너무 많이 미안했다. 그리고 더 좋은 환경에서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알아봐 주고 노력해 준 아내에게 너무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결혼한 지 얼마 안돼서 일어난 일이기에 뭐라 설명할 수 도 없어고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수술을 잘하고 검사결과는 흉선종(흉선암) 2기에서 3기로 넘 거가는 단계라고 했다. 나는 어떤 말을 했는지 잘 몰랐다. 아내가 간호사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의사가 어떤 이야기를 해줘도 잘 알아듣고 나를 간호해 줬다.
그렇게 나는 인생에 큰 고비를 넘기고 새로운 목숨을 하나 선물 받았다고 생각했다. X-RAY 상으로 발견하기 힘든 걸 발견했고 또 서울대학교 병원에 수술을 할 수 있게 해 준 아내에게 한 번의 생명을 선물 받았다고 생각했다.
수술을 하고 나서 보니 세상이 좀 달라 보였다. 서울대학교 병원 2층에서 보면 창경궁이 보이는데 수술을 받으러 갈 때에는 보이지 않았는데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다시 병원을 찾았을 때는 보이기 시작했다.
그저 열심히 살아온 삶에 꽃 한번 피우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고 갔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병원을 찾고 있었다. 지금은 수술 7년 차가 되어 관찰 중에 있다. 처음에는 몇 개월에 한 번씩 병원에 가다가 1년에 한 번씩 가는 기간을 거쳐 지금은 2년에 한 번 병원에 가서 현재 상태를 확인한다.
그때 일을 겪고 나의 아내는 간호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아빠가 갑자기 없어져도 가정을 지킬 안정적인 직장을 찾기 위해서 간호사로 일하는 것보다 간호공무원이 되는 게 더 안정적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내는 내 뒷바라지를 해주고 아들을 보면서 밤에 틈을 내서 공부를 했다. 참 대단한 사람을 내가 아내로 맞아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표현은 잘 못했지만 엄청 똑똑하고 자신감 넘치는 아내를 보면서 내가 많은 반성을 했다.
그렇게 아내는 학원 한번 다니지 않고 간호공무원에 합격을 했다. 우리는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한 번의 큰 계기로 인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했고 아내의 직업이 변경되었다. 어떤 게 행복하고 올바른 삶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잘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항상 고마운 아내 한승희에게
부족한 남편을 믿고 지켜줘서 고맙고, 아이들을 잘 키우고 가정을 잘 지켜줘서 고맙다.
여러 번의 이사와 많은 어려움을 줬기에 미안한 마음이 크고 항상 고마워
인생을 다시 살게 해 줘서 고맙고 아이들 잘 키우면서 열심히 살자.
사랑하는 아내 한승희 언제나 사랑합니다.
* 흉선암은 수술 후 10년 정도 관찰을 통해 완치여부를 판단한다고 한다. 지금도 나는 병원에 가고 있다.
다시 받은 삶을 사는데 복잡한 게 너무 많다. 그래도 항상 감사하고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