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출근길은 익숙하면서도 부자연스럽다. 준비를 잘해서 여유 있게 출근하는 날이 없다, 간혹 가뭄에 콩 나듯 준비를 모두 마치고 시간이 되어 나가면서도, 출근 직전에는 언제나 일이 생긴다. 정신없이 핸드폰과 지갑을 챙기려고 하면 꼭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화장실은 집을 나서기 바로 직전에만 꼭 배가 아프고, 중요한 걸 잊었단 사실이 생각난다. 방금 전까지 아이들에게 왜 학교 갈 때마다 전쟁을 치러야 하는지 타박을 해 놓고, 정작 내가 출근할 때가 되면 꼭 더 큰 전쟁을 치른다.
오늘 아침에도 그랬다. 양말에 구멍이 났고, 화장실을 들러야 했으며, 무선 이어폰에 배터리가 부족하다며 빨간불이 들어오고, 어제까지 끝내기로 했던 문서작업을 안 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렇게 부랴부랴 기차역까지 이동해서 기차를 타려는데, 얼마 전 리퍼럴을 받은 병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여기는 xx병원인데요. 예약확인차 전화드렸습니다.... 씨죠?"
"네"
"주소 하고 생년월일 확인 좀 해주세요."
"제 주소는..이고요. 생년월일은...입니다."
"네. 확인되었고요. 예약일자는...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관련한 안내문을 보내드릴 이메일주소를 알려주세요"
"네, 제 이메일주소는 엠. 에이...."
기차 안내방송은 왜 항상 이럴 때만 나오는지..
"이번 역은...이고, 이번 역에서는 특정 출입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2134번, 2136번, 4322번......"
"여보세요? 하나도 안 들려요. 다시 이야기해 줄래요?"
"미안해요. 여기가 열차 안이라서 그래요."
나는 좀 더 큰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다.
"제 이메일 주소는..."
"다시 한번 알려드리겠습니다. 다음역에서 열리지 않는 문은, 2134번, 2136번..."
"여보세요? 하나도 안 들려요. 급한 거 아니니까 예약 전에 전화 한번 다시 주세요"
"네. 고맙습니다"
전화를 끊고 보니, 아침부터 본의 아니게 개인정보를 너무 많이 유출했음을 알았다. '생년월일을 너무 크게 이야기했나?' , '이 정도면 이메일로 스팸도 받게 되겠는데' 하는 괜한 걱정도 한다. 그리고 만약 병원 상담원이 한국사람이고, 한국말로 예약을 잡았으면 좋았을 텐데 라는 상상을 해본다.
캐나다에 살면서 한 가지 소소한 재미는 보통 사람들이 한국말을 잘 모른다는 거다. 물론 토론토 쪽으로 이사 오면서, 그 비밀언어가 가끔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만, 보통의 경우에는 여전히 비밀스러운 언어로 쓸만하다. "이 아저씨 좀 이상한데, 조금만 떨어져서 걷자", "이건 좋은데 너무 비싸다", "아빠는 아까 그 가게 물건이 더 마음에 드는데. 다시 그리로 갈까?" 같은 식의 이야기를 한다. 들어도 크게 상관없지만, 들으면 살짝 기분이 나쁠 말들.
다만, 비밀언어도 언제나 통하지는 않는다. 몇 년 전 어머니가 캐나다에 오셔서 몇 달간 있다 가셨는데, 친구 베쓰를 만났고, 어머니는 바로 "와! 베쓰는 몇 년 전에 봤던 것보다 살이 더 찐 거 같아. 엄청 크네."라는 말을 하셨다. 그런데, 눈치 빠른 베쓰가 바로 "너네 엄마가 방금 나한테 뚱뚱하다고 하신 거야?"라고 했고, 나는 "응, 미안해, 그런데 방금 전에 나한테도 똑같이 말했어"라고 말하고, 같이 한참을 키득거렸다. 그리고 베쓰는 가끔 내가 우리 어머니 이야기를 할 때면, 그때 이야기를 한다. "너네 엄마가 나한테 뚱뚱하다고 했던 거 기억나?"
그렇게 또, 한참을 예전 친구들과 수다 떨었던 생각을 하고 나니, 벌써 내릴 역이다. 오늘도 또 돈을 벌러 출동해 본다.
그나저나, 예약이 언제라고 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