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에 찬 헛소리와 그 이유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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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점: 4.5/5.0
한줄평: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간극은 종이 한 장 차이다
발간일: 2023년 9월 25일
읽은 시기: 2025년 8월
1. 우리 머릿속의 세계관. 우리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진화적으로 생존에 유리한 것을 취사선택해 인지한다. 데이비드 이글만(우리는 각자의 세계가 된다, 무의식은 나를 어떻게 설계하는가), 도널드 호프만(The case against reality) 등 뇌과학자들도 유사한 이야기를 한다. 인지 왜곡은 시각 정보를 받아들일 때부터 시작해서, 주어진 정보를 처리하고 세계관을 형성하는 전반에 걸쳐 발생한다.
2. 망상이란 무엇인가. 미국 정신의학회에서 발행하는 "정신장애 진단 미 통계편람(DSM-5)"에서는 망상을 "명백히 반대되는 증거가 있는데도 변치 않는 확신"으로 정의한다. 망상과 강한 주장을 구분하는 것은 때로 어렵다. 이 정의에 따르면 확신은 기존 증거와 합치돼야 하고, 증거는 진실성 측면에서 명백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명백하고 합리적인 증거란 무엇인지를 고민하면 철학의 해묵은 고민거리인 인식론(epistemology)에 다다르게 된다.
3. 기술적 확신과 규범적 확신.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거나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면 건강에 도움 된다는 주장은 기술적 확신이다. 모든 사람에게 표현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거나 하는 식의 옳고 그름에 대한 것은 규범적 확신이다. 기술적 확신은 반대되는 과학적 증거가 유의미한 통계 데이터와 함께 주어진다면 바꿀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건강 관리에 대한 확신은 세대를 지나오면서 계속 바뀌었는데, 철마다 유행이 다르다. 이제는 무조건 덜 먹고 운동하는 것이 아닌 혈당 관리와 저속 노화가 주류로 자리 잡은 것 같다. 과거에는 와인 한 잔은 혈액 순환에 도움이 된다는 식의 주장이 있었으나, 이제는 알코올 섭취의 건강상의 이점은 아예 없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
4. 인식적 합리성. 우리의 지각과 인식은 제한돼있으며 특정 상황의 합리적 행동이 다른 상황에서는 아닐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진술은 매우 개연성이 낮은 것에서 굉장히 있을법한 것까지의 눈금으로 측정할 수 있다. 한 인간의 확신은 그것이 확률론에 부합할 때만 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
정치베팅 사이트 FiveThirtyEight 창업자인 네이트 실버의 저서 리스크 테이커:On the Edge에는 다양한 유형의 위험을 감수자가 등장한다. 확률적 사고에 익숙하고 스스로 합리적이라고 여기는 사람일수록 일반적인 의미의 공감 능력은 낮다. 그러나 이들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사고해 보는 '전략적 공감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전략적 사고는 더 뛰어나다.
5. 실용적 합리성. 사실에 부합한 내용이냐에 대해서는 비합리적일지라도 실용적인 의미에서는 합리적일 수 있다. 종교적 믿음에 대해 종종 언급되는 논지인데, 트럼프 지지자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저임금 백인 노동자로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는 불변하는 상황에서, 세계화에 따른 제조업 외주로 일자리를 잃게 된 것이 자신의 탓이 아닌 외부의 탓이라고 믿는 것이 정신 건강에 도움 될 수 있다.
6. 불안감은 트럼피즘의 추동 요인이 아닐까? 알랭드 보통의 저서 '불안'의 표현을 빌린다면, 능력주의 사고관이 사실인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한 것은 내 탓이 되고 그렇기에 불안을 느낀다. 봉건주의 사회에서 농노로 태어난 것은 내 잘못이 아니지만, 능력주의 사회에서 성공하지 못한 것은 어쩐지 내 잘못인 것 같기 때문이다. 러스트 벨트 노동자 입장에서 '네 삶이 힘든 것은 너의 탓이 아니라 멕시코와 중국 탓이다'라고 말하는 트럼프의 대안적 세계관은 실용적 합리성을 갖게 되며, 정치 성향에 따라 아예 서로 다른 사실을 믿게 되는 탈진실(post-truth) 사회로 이어진다.
7.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들. 과거에는 정신분열증이라고 불렀고 이제는 조현병이라고 부르는 증상을 앓는 사람들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남들이 보지 못하는 미래 전망을 제시하고 그것을 달성하는 사람은 비전이 있는 사람(Visionary)이라 부르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패턴이나 암호를 해독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암호해독가라 부른다. 게임이론을 만들어내 노벨상을 수상한 것으로 알려진 존 내쉬는 실제로 정신분열증을 앓았다. 다소 각색이 있지만 그의 일화는 뷰티풀 마인드라는 영화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