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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절 같은 사람

3-11. 사람과 사람 사이

by 이 순간


윤활유 같은 사람이 있다.

뼈와 뼈 사이를 부드럽게 연결해 주는 관절처럼,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런 역할을 하는 이들이 있다.


뼈와 뼈끼리는 부딪치면 아프고,

쉽게 상처가 나지만 관절이 중간에 있으면 움직임이 훨씬 원활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관절 같은 사람’으로 살아왔다.







가정에서는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중재하는 역할을 했다.

어머니는 내게 종종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네 말은 듣잖니.”

가족 안에서의 내 자리는 늘 중간자였다.


직장에서도 비슷했다.

같은 교과나 학년의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중간에서 대화를 이어가곤 했다.

모임이 셋이라면, 나는 가운데서 분위기를 맞추는 사람이었다.


그 역할이 버겁거나 싫진 않았다.

어느 정도는 내가 선택한 자리였고,

사람들 사이의 어색함을 풀고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건 내 장점이기도 했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나는 언제 나를 주장하지?’


사실 이런 ‘중간자’의 역할은 많은 이들이 한 번쯤 경험해 본 자리이기도 하다.

가족이나 친구 사이에서, 혹은 직장 내에서 자연스럽게 그 위치에 서게 되는 사람들.

누구도 맡기지 않았지만, 어느새 그 자리에 서 있는 경우가 있다.






관절 같은 사람들은 두각을 드러내기 어렵다.

대놓고 자기 주장을 말하거나 단호하게 경계를 긋는 사람들보다 느리게 인정받고, 희미하게 기억되는 존재다.


이는 개인의 성격 때문만은 아니다.

사회는 종종 ‘드러나는 사람’을 더 먼저 주목하고, ‘연결하는 사람’의 역할은 당연시해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계가 오래 지속되기 위해선, 이런 조용한 연결자들의 힘이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직장에서든 친구 사이든, ‘잘 맞춰주는 사람’으로 보여왔던 것 같다.

자연스럽게 상대에게 맞추는 것이 편했고, 존중하면 나도 존중받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유연하게 대하다 보면, 정작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타이밍을 놓치기도 한다.


그렇지만 나를 알아주는 사람도 있었다.

작년에 교원을 위한 심리검사에서 만난 임상심리사 선생님은 내게 말했다.


“선생님은 따뜻하고 포용적인 사람이에요. 선생님이 모임에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져요. 사람들이 그걸 알아서 선생님을 자꾸 찾는 거예요.”


그 말은 큰 위로가 되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필요할 때 불리는 존재라고 생각해왔지만,

그 말은 내가 가진 힘을 새롭게 바라보게 해주었다.






앞으로 공감 능력과 중재의 힘이 더 인정받는 시대가 올 거라 믿는다.

관절이 없으면 몸이 원활히 움직이지 않듯,

사람 사이의 갈등을 줄이고 흐름을 이어주는 이들이 더욱 소중해질 것이다.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은 결코 당연한 존재가 아니다.

닳고, 지치고 잊혀지기 전에,

나 스스로 내 가치를 알아보고 단단히 지켜야 한다.

나를 지치게 하는 방식으로만 살아갈 순 없다.


관절 같은 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이제는 나를 위해 숨을 고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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