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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하지 않아도 괜찮아, 즐거우니까

3-10. 함께 웃을 수 있는 힘.

by 이 순간


즐거움을 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건 큰 복이다.


부모, 학생은 물론 직장인, 나이와 역할을 막론한 모든 사람에게 ‘좋아하는 것’은 필요하다.

삶이 녹록지 않은 순간에도, 그런 즐거움이 하나 있으면 버틸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나를 단단히 지켜주는 힘은

결국 내가 나를 잘 돌볼 때 생긴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마음을 다잡는 시간,

그것이 바로 회복의 시작이다.







나는 어릴 때 운동을 잘하지 못했다.

(지금이라고 잘하는 건 아니지만.)

겉모습은 재빠르게 생겼지만, 100m 달리기를 20초는 거뜬히 넘기던 느린 아이였다.

체육은 늘 수행평가를 위한 과목일 뿐, 재미와는 거리가 멀었다.

다른 과목도 특별히 잘하진 않았지만, 체육만큼은 특히 ‘못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그 생각 자체가 운동을 못하게 한 결정적인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그건 비단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운동을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가 자연스럽게 구분된다.

체육시간의 활약 여부가 친구 관계나 자존감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그 구분은 어른이 되어서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


사실 운동이 재미있는 아이들은

삶에 하나의 ‘비장의 카드’를 더 가진 셈이다.

우울하거나 힘든 순간에도 몸을 움직이며

자신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래 나에게 운동은 그런 회복의 도구가 아니었다.


나는 줄넘기를 하면 X자 뛰기도 안 되었고,

농구공은 림에 닿기조차 어려웠으며,

발야구를 하면 헛발질이 일쑤였다.


잘하지 못한다는 자각은 곧 회피로 이어졌고,

운동은 점점 더 멀어졌다.






그런 내가 몸으로 하는 일에서 즐거움을 느낀 건

둘째 출산 후 복직했을 때였다.


출산 이후 불어난 몸을 걱정하던 중,

동료가 배드민턴을 함께 치자고 제안했다.


솔직히 내 실력은 셔틀콕이 네트를 왕복하기도 힘든 수준이었지만,

동료도 자신이 못한다며 함께 해보자고 독려했다.


처음엔 역시 ‘셔틀콕 줍기 운동’에 가까웠다.

내가 놓친 셔틀콕에, 혹은 동료가 못 받은 셔틀콕에.

제대로 주고받지도 못하면서도 계속 웃음이 났다.


어이없고 엉성한 플레이였지만, 우리는 진지하게 임했다.

사실 못 치면 짜증이 나야 하는데 재미있었던 이유는

서로가 못 치는 걸 처음부터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콕이 한 번 왕복하면 환호했고,

두 번 왕복하면 “콕이 안 보일 정도로 빨랐다! 실력이 늘었다”며 서로를 과하게 칭찬했다.


지나가던 체육 선생님은 우리의 대화를 듣고 크게 웃으셨다.

하지만 잘하지 않아도 이렇게 즐거울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운동이 이런 재미를 주다니, 내겐 놀라운 경험이었다.


물론 운동이 아니어도 좋다.

잘해야만 재미있는 건 아니다.

못해도 웃을 수 있고,

함께 하는 사람 덕분에 즐거워질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큰 힘이다.


삶이 힘든 순간에도

내 곁에 그런 즐거움을 함께할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 시간을 견딜 수 있다.






이제 나는 X자 줄넘기도 하고,

20대에 못했던 접영도 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여전히 볼링은 도랑으로 빠지고,

에어로빅은 테슬라 AI 로봇보다 더 어색하게 추지만,


그게 뭐 어떤가.

재미있으면 됐다.


잘하지 않아도 나를 즐겁게 하는 것들이 하나씩 늘어났고,

그것이 곧 회복의 힘이 되었다.

누구에게나 운동이 맞지는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즐거움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즐거움은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번져,

마음을 조금씩 풀어지게 하고 세대와 세대를 잇는 연결고리가 되기도 한다.


즐거움을 내 삶에 하나씩 늘려가는 것.

그것이 바로 스스로를 치유하는 과정이 아닐까.

오늘,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을 하나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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