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컸다. 하지만 아직 어리다.
내 이름 이건우를 포함하여 우리 오 총사의 이름들이었다. 우리는 뒤로 나갔다. 창호가 우리의 이름을 담임 선생님께 말한 것이었다. 뒤로 나가서 가장 많이 괴롭힌 순서대로 복도 쪽을 향하여 서라고 했다. 이 때 선생님은 다른 반 친구들에게 저 순서가 맞냐고 계속 물었고 이내 대준이가 대답했다.
“이건우가 가장 많이 괴롭혔어요. 선생님”
대준이의 말 한 마디에 우리 반 친구들은 모두 나를 제 일 순위 가해자로 지목하였다. 그렇게 나는 창호를 괴롭힌 일 순위 가해자가 되었다. 나는 뒤로 나가 사물함 앞쪽에 서 있으면서도 창호를 계속 바라보았다. 창호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우리 반의 인민재판이 열리게 되었다. 나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발버둥은 창호를 원망 어린 눈으로 계속 바라보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그렇게 새로운 멍이 기존에 있던 멍 위에 생겼다. 이전보다 더 짙고 어두운 색의 멍이었다. 이미 맞았던 자리에 또 맞아서 그럴까. 아니면 너무 억울해서 그런 것이었을까. 아니면 창호를 도와주지 못해서였을까. 그 색의 깊이는 속을 알 수 없는 어두운 바다 속 검정 물결 같았다. 그리고 그 멍 자국은 일 학기가 지나갈 때 까지도 없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창호와 이후 대화를 하지 않았다. 오해를 풀고 서로 사과를 하는 아주 단순하고 쉬운 과정을 우리는 거칠 수가 없었다. 그 과정을 나의 종아리에 있는 멍 자국이 막아섰다. 용기를 내지 못하게 나를 막았다. 나는 그 때 너 지켜주지 못해서 너무 속상하고 미안했다고, 급식실에서 그렇게 말해서 정말 미안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들은, 그 사과의 감정들은, 나의 멍이 전부 먹어 치워 사라져버렸다. 우리는 그렇게 두 번 다시 서로 대화하지 못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면서 늦여름과 초가을 같은 더위가 쨍쨍할 때 나의 반에도 곧 여름방학이 끝나게 되었다. 2학기 개학을 하기에 앞서 교실 정리를 하다가 잠깐 의자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우리 반 교실 뒤에는 나의 반 학생들 27명의 미술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작품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우리 반 아이 중 한 명이 만든 찰흙 성이 눈에 들어왔다. 찰흙 성의 이름은 행복한 성이었다. 그 이름을 보고 있자니 문득 내가 임용고시 면접을 준비하던 때가 떠올렸다.
“아이들이 행복한 학교, 오고 싶은 교실을 만들겠습니다.” 임용고시 최종 면접 때 실제로 했던 답변이다.
우리 반 아이들은 내 교실이 즐겁고 행복할까. 의자에 앉아 뒤로 등을 젖힌 후 계속해서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에 생각의 꼬리를 물어 어쩌다가 내가 교직에 서게 되었는지 까지 생각이 트게 되었다. 나는 그저 그런 학생 중 한 명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공부를 반에서 3~4등정도 했었다. 이런 아이들은 보통 고3이 되면 여기서 좀 더 욕심을 내어 등수를 높이거나 아니면 공부에 추진력을 얻지 못하여 등수가 유지 되거나 떨어지거나 했다. 나는 후자의 학생이었다. 공부라는 것에 대한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었다. 그저 습관처럼 남들 다 하니까 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 등수만 유지했다. 그래서 대학 입시가 끝나고 원하는 학교를 지망할 때 나의 의지 보다는 부모님의 의지가 반영되어 학교를 결정했다.
’교육대학교‘
나의 성적에 적합하면서도 부모님의 의지가 강력하게 반영된 좋은 선택지였다. 나는 그 학교를 선택하였고 그렇게 선생님이 되는 길을 가게 되었다. 매우 간단한 선택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하고 싶은 것도 잘하는 것도 없는, 그저 그런 학생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선택을 구태여 굳이 후회해 본 적도 없었다. 어느 정도 만족을 했기 때문이다. 안정된 직장과 적절한 사회적 위치 이 두 가지의 장점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만족했다. 그러나 힘든 적이 없었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나에게 욕을 하고 주먹질까지 하는 학생도 있었다. 전화를 걸어 이상한 분풀이를 나에게 하는 학부모도 있었고, 쉽게 적응 할 수 없는 교직 내 다양한 문화도 아직 남아있었다. 그리고 교실 속에서 선생님의 권력은 이전보다 굉장히 많이 축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