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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본아 Nov 19. 2024

05. 부모의 아픈손가락

자책은 언제나 나의 몫이다


제발 어떤 병인지만 파악했으면 좋겠다. 작가가 되겠단 꿈보단 이젠 그것이 나의 소망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암이든, 희귀병이든.     

정확한 병명을 알면 그에 따른 약을 처방받을 것이며, 그 병명에 따라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것이고, 나아질 수 있단 희망이 있겠지.     

근데 실마리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역류성 식도염 약을 복용해서 토하고, 이비인후과 약을 복용해도 목이 찢어지게 아팠다. 그러다가 발바닥에 염증도 도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다리가 부은 것처럼 콕콕 쑤시다가, 혈관이 터질 것 같았고, 걷는데도 이물감이 드는 것 같이 불편하게 되었다. 그렇게 야금야금 아프다가 결국 발바닥 전체까지 염증이 퍼져 버린 것이다.     


+1 진통제 소염제도 추가되었습니다.     

몸이 이 지경이 되니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다. 숙면은커녕 누우면 더 괴로워서 결국 동네의 신경외과를 내방하게 되었다.     


+1 불면증 관련 약까지 추가되셨습니다.     

점점 고통은 배가 되고 약의 가짓수를 많아져만 갔다. 그렇게 알 수 없는 병에 시달리게 되자 속수무책으로 불행에 빠졌다. 


내 시간도, 웃음도, 행복이 다 증발되었다. 원인 불명의 고통으로 오직 생존을 위해 숨 쉬는 삶으로 변해갔다. 좀비 같은 존재, 그게 내가 될 줄이야.

아프게 되자 나는 큰 절망에 빠져 버렸다. 침대에 누워서 ‘왜 이렇게 되었지?’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를 한참 생각하게 되었다.     


회사를 퇴사한 게 잘못이었을까. 어떻게든 버텨서 팀장이 되었으면 좋았을까. 그게 아니면 작가란 꿈을 선택한 게 문제였던가.     


사람에게 시달린 게 괴로워서, 작가란 꿈을 핑계로, 내가 현실 도피를 하려고 했던 걸까. 소위 작가가 될 수 있단 가능성이란 환상 속에서 안주하려고 했나.     


고통이 극한으로 치닫자 스스로를 물어뜯었다. 내가 열심히 했던 시간과 꿈을 위해 투자한 최선도 한없이 비하하게 되었다.     


나 때문이야. 내가 문제야.     


작가해보겠다고 괜히 설쳐서, 응원해준 엄마 아빠에게 짐이나 되고, 이렇게 아픈 병자가 되고 말이야.  나란 존재가 쓸모가 없는 것 같이.     

‘어째서 이런 거야.’     

열심히 했는데 왜 이런 결과가 초래되는 걸까. 행운은 언제나 내 편이 아니었고 불행은 언제나 불시에 나를 덮쳐왔다.     


노력하면 인생이 필 수 있다는 말. 열심히 살면 성공할 수 있다는 말. 명(命)은 정해져 있어도 운(運)은 사람에 의해 결정된다는 말.     


나와는 거리가 먼 나라의 이야기 같이 느껴졌다. 불행한 팔자라는 게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건가. 불행을 갖고 태어난 그 당첨자가 나인 것 같았고, 그 뒷받침이 되는 것이 남들과 다른 출생 때문이었다.     


나는 미숙아이자 팔삭둥이로 태어났다.     




엄마는 결혼하고 한 달 만에 나를 임신했다. 출산 예정일은 10월 초쯤이었지만 갑작스레 양수가 터졌다고 한다.  그렇게 뜻하지 않게 8월 여름에 출산을 하게 된 것이다.     


의사가 말하길, 

산모가 소리를 지르면, 

뱃속의 아기에게 산소 공급이 되지 않아서 위험할 수가 있다고. 


엄마는 혹여 아이가 잘못될까 소리도 못 질렀다고 한다. 거의 15시간의 사투 끝에 엄마는 자연분만으로 나를 낳게 되었다. 

당시 2.1kg이었고, 몸무게가 미달이라, 아기였던 나는 엄마의 품을 떠나서 곧장 인큐베이터에 가야만 했다. 엄마는 산후 조리는커녕 몸도 제대로 못 풀고, 미숙아로 태어난 아기를 보러 매일 같이 병원에 출근 도장을 찍었고.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면회 가서 ‘아기 상태는 괜찮은가요?’라고 물었는데, 간호사가 건강은 양호한데 아기가 자주 운다고 했다고.     


엄마는 놀라서 혹시 아기가 배고파서 우는 게 아니냐고 물었고, 간호사는 아마 그게 맞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한다.     

알고 보니 나는 한 번 분유를 먹을 때 많이 먹지 않고, 자주 먹는 스타일이었는데, 병원에서는 딱 정해진 시간에만 분유를 줬나보다. 그걸 알고 엄마는 그 간호사에게 아기 분유 좀 자주 먹여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고.


한 달쯤 지나서 나는 건강하게 퇴원을 했다.     


팔삭둥이라 엄마는 내 건강에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한다. 그때 당시 다양한 곡물을 직접 빻아 만든 석식을 파는 곳이 있었는데, 집과는 거리가 멀었고, 엄마는 버스를 타고 직접 선식을 사와서 지극정성으로 나를 먹였다. 그 덕에 집에 온지 한 달 만에 나는 정상 체중이 되었다. 앨범 사진을 보면 팔삭둥이란 게 무색할 정도로 얼굴이 포동포동하니까.     


엄마의 정성과 달리 나는 느린 아이였다. 

말하는 속도도, 걸음도, 밥을 먹는 것도, 이해하는 것도 모두 다. 

남들보다 시간을 더 오래 들여야 했고, 

그로 인해 언제나 연년생인 남동생과 비교되었다.     


남동생 S는 똑똑했고 뭐든 잘하는 아이였다. 피아노 학원도, 미술 학원도, 영어 학원도 함께 다녔지만 칭찬은 언제나 남동생이 받았다.     

같은 시간이 주어지면 동생은 이해력도 빨랐고, 한 번 알려주면 일취월장했고, 나는 버벅대기 바빴다. 그래서 언제나 주눅이 들었고 ‘누나인데 왜 동생보다 잘하는 게 없을까.’라고 속상했던 기억이 많았다.  

동생을 탓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가 답답했다. 나도 보란 듯이 해내고 싶었는데 언제나 그게 잘 되지 않았으니까.  

나는 느리고, 예민하고, 눈물도 많은 아이였다. 그럴 때마다 한없이 약한 내가 너무 미웠지만 ‘토끼와 거북이’ 동화를 떠올렸다. 

토끼는 거북이보다 빨랐지만, 결국 결승점에 거북이는 도착했잖아.     


느리지만 꾸준히 한 걸음씩 나아가보자.     


남들보다 빠르지 않지만, 부지런하고 진심을 다하면, 언젠가는 활짝 내 얼굴에 웃음꽃이 필거라고 믿었다.     

그 희망 하나로 내 인생 한 발짝씩 걸었는데, 이게 뭐람. 


왜 나의 최선은 언제나 절망이 되어 돌아오는 걸까.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하는 것 같았고, 내 인생 밑이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 같았고, 물가에서 허우적대는 미운오리 새끼 같았다.     

내가 안 되는 이유가 체력 때문인 걸까.     

어릴 적부터 몸이 약했고 골골댔다. 어떤 병이 있었다기보다는 비실댔다는 표현이 정확할 듯싶다.  조금만 집중해도 에너지가 방전되고, 꾸벅꾸벅 조는 건 일상이고, 감기도 자주 걸려서 엄마가 연례행사처럼 한약을 자주 해서 먹였다.      


답답한 게 바로 그거였다. 

열심히 하고 싶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았고, 건강이 내 인생의 최대 아킬레스건이었다. 그래서 내 소원이 바로 무언가에 열렬하게 미쳐보는 것이다. 몰입을 해서 시계를 보면 ‘어라 새벽이네?’ 그런 걸 경험해보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게 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언제나 체력적인 한계에 부딪쳐야만 했고 결국 나는 병자가 되었다.     


‘처음부터 바라면 안 되는 거였나.’     

태어날 때부터 부모의 아픈 손가락. 뭔가 하려고 할수록 부모에게 짐이 되는 자식. 벗어나려고 할수록 못난 자식이 타이틀이 되는 현실.     


엄마 뱃속에서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팔삭둥이로 태어난, 내가 왠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죄가 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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