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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본아 Dec 12. 2024

12. 돌변해버린 아빠

마주하는데 가까워질 수 없는 평행선, 그건 바로 아빠였다


나는 아빠와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다. 대게 아빠와 딸 사이가 그렇듯이 대화를 자주 하며 소통하지는 않았다.  다정다감하진 않지만 내게 이유 없이 화내진 않았다. 더구나 물리적인 훈육 또한 받으면서 자라지도 않았다.      


기억나는 건 이렇게 떼쓰고 그럴 거면 집을 나가거라. 어린 내 손을 끌고 현관 앞을 나간 정도뿐이었다.  


사실 아빠와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진 않았다. 회사에서 늦게 와서 저녁에 잠깐 얼굴을 보는 게 다였다.  그러다 내가 10살 정도 되었을 무렵이었다.  다니던 회사에서 아빠는 중국으로 발령이 났다. 고심 끝에 아빠는 홀로 떠나고 우리는 친할머니와 함께 살기 위해 이사를 오게 되었다.     


엄마, 아빠, 나, 남동생. 우리 네 식구는 이산가족이 되었다. 


낯선 곳에 이사를 온 것보다 아빠의 부재가 참 컸다.  지금은 인터넷이 발달 되어서, 화상 통화도 언제든지 가능하지만, 그때는 유일하게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 전화였다.  그것도 해외로 전화를 하려면, 국제 전화 카드를 사야만 했는데, 안내 음성에 따라 번호를 눌러 매일 밤 아빠에게 연락했다.     


아빠의 안부를 물으면서, 보고 싶다고 했고, 그때도 술을 많이 마시고 그랬으니, 항상 건강 조심하고 술 적게 마시고 담배 조금만 피라고 말했다. 생각해보니 어릴 적부터 진짜 입에 달고 살았던 말이었다.  왜냐면 전화했을 때 자주 취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이 뭉그러지고 갑자기 우당탕 넘어지는 소리가 들리며 전화가 끊기는 일이 생겼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 여보!  엄마는 전화기를 부여잡고 당황해 했다. 다급히 다시 전화를 하면 뚜, 뚜, 뚜 통화음만 들려왔다. 잠을 못 자고 엄마는 연락을 시도하고 그 옆에서 나는 늘 조마조마했다. 간신히 통화가 되면 안심하고 잤던 기억이 수두룩하다.     


그럼에도 아빠는 내게 그리운 사람이었다. 술에 많이 취해 있어도 가까이 가면 담배 냄새를 풍겨도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어린 마음에 그런 생각을 많이 했었다. 초등학교 운동회 때 아빠 손잡고 같이 오는 애들이 부럽기도 했다.  나도 아빠랑 놀이동산도 가고, 여행도 가고, 자전거도 함께 타고 싶다. 아빠가 보고 싶을 때마다 함께 살고 싶다고 엄마에게 투정을 부렸다.     


아빠가 우리를 위해 지금 먼 타국에서 고생하며 일하는 거야. 이 정도는 기꺼이 감사해야 하고 우리는 아빠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살아야 한다. 우리가 먹는 것, 입는 거, 그 모든 것들이 다 아빠가 돈을 벌어서라고. 

그 이후 나는 아빠가 보고 싶단 말만 하고, 함께 살고 싶단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휴가 받아 한국에 올 아빠를 기다렸다. 전화로 온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달력을 보면서 카운트다운을 세며 잠도 설치고 설레어 했다. 함께 가족끼리 어디를 갈지 머릿속으로 상상을 하다가 잠에 들었다.     


근데 참 이상도 하지. 아빠가 내 눈앞에 있는데 이웃집 아저씨보다 더 낯선 기분이 들었다. 그토록 보고 싶고, 함께 있고 싶고, 같이 살고 싶었는데, 막상 아빠가 오면 서먹하고 데면데면하게 된 것이다.     


나와 동생은 아빠가 오면 엄마 등에 가서 숨었다. 엄마가 오히려 쭈뼛거리는 남매에게 아빠한테 가보라고 등을 떠밀 정도였다. 그렇게 아빠는 일주일 정도 휴가내서 오는데, 조금 가까워지려고 하면 출국을 하게 되었다.     

그리운데 막상 보면 어색한 사이였다. 마주하는데 가까워질 수가 없는 관계, 보고 싶지만 막상 함께 있으면 불편한 사이, 내게 아빠는 평행선 같은 존재였다.      


그럼에도 어린이였던 나는 믿었다. 지금은 떨어져 있지만 우리 가족 모두 다 같이 사는 날이 올 것이라고.     

그것이 행복의 완성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친할머니와 함께 살다가 15살 때 중국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 아빠와 함께 살고 싶다는 내 소원이 실제로 일어나게 된 것이다.     


기적과도 같았지만 내가 믿었던 나의 행복은 완성되지 않았다.  늘 보는 아빠는 주취와 흡연으로 절여져 있었다. 그 속에서 나는 늘 불안했다. 인사불성이 된 그 주말에 아빠는 항상 외식을 시켜 주었다. 그러면서 회사에 다니며 돈을 벌려면 어쩔 수 없는 부득이한 일이라는 말을 아빠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어릴 적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자랐다. 그저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자녀였고 돈으로 곤궁함을 느낀 적은 없었다.  비싼 것들은 아니지만 먹고 싶은 건 엄마가 바로 사주었다. 용돈도 부족함 없이 받았고 대학교 등록금도 부모님이 지원을 해주었다. 물론 아빠의 어떤 부분이 불만스럽기도 했지만 스스로 이 부분을 합리화했다.     


아빠는 우리 가족을 위해서 고생했으니까, 이 정도는 이해를 해야겠지.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았지만 내 마음의 곳간은 늘 비어있었다. 


생각해보면 그건 인정과 관심이었던 것 같다.      


아빠는 내게 화도 안 냈지만 칭찬을 해준 적도 없었다. 퇴직을 하고 나서는 오직 내게만 날선 말과 적대적인 행동을 해서 사이가 멀어졌을 때도 있었다. 


그런 아빠가 어느 날 내 꿈을 지지해준다고 했을 때 눈물이 날만큼 고마웠다.  내게 관심도 없고 한심하다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내 오해구나. 


이때부터 아빠와의 사이가 조금씩 좋아졌고 회복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빠에게 꼭 내 꿈을 이루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단지 그 뿐이었는데 담배 때문에 모든 게 다 틀어졌다.

    



담배로 인해 아빠의 새로운 모습과 마주했다. 막무가내로 우기고 화를 내는 아빠는 내게 참으로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살면서 우리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물론 이야기를 하면 대답도 안 하고 시큰둥했지만 ‘무뚝뚝한 성격이라 그런가보다’라며 전형적인 우리네 아버지상이 바로 나의 아빠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건강이 무너졌고 원인이 실내 흡연인 걸 알았다.  본인 건강을 위해서라도 금연을 해야만 했다. 또 자식이 담배 때문에 아프다는데 심지어 밀폐된 공간에서 담배를 태우기까지? 담배 문제로 집안에 분란을 일으키는 아빠가 이해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이 이거였다.     


나를 지지한다고 해놓고, 왜 앞으로 나가질 못하게 하는 것인가. 분명히 원인은 실내 흡연이고 이것만 제거되면 내가 건강을 잃지 않고 작가가 되기 위해 노력해 보겠다고 하지 않나. 그런데 왜 담배로 인해 내가 나아가질 못하게 붙잡는 것인가.     


돌연 변해버린 아빠로 인해 나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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