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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비범 Apr 27. 2024

관계를 무너뜨린 그 시작은

두 글자

개지 않을 것 같던 안개를 걷어내기 시작한 그 처음은 뭐였을까.


여느 날처럼 엄마는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모두 내 탓으로 돌리는데 힘쓰고 있었다. 자취하는 내 방에 놀러 온 날이었는데 그 시작은 머리카락이 하수구에 들어가니 욕조에서 씻어달라는 내 요구였다.

자신이 손님이니 자기가 편한 대로 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했고 나에게 맞춰야 하는 상황이 불편하고 싫었다고. 자식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게 너무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었다. 평소였다면 그냥 길어지는 싸움이 싫고 박수의 짝소리는 양손이 와서 부딪히는 것이니 그 어딘가 내 잘못도 있을 것이란 생각에 그저 미안하고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 절절하게 말했을 것이다. 그날은 그냥 그게 너무 사소하고 서러웠다. 저 작은 거 하나를 맞추기 싫어서 자신의 기분이 나빠진 게 모두 내 탓이라며 화를 내는데 이게 과연 딸과 엄마의 관계가 맞는지 현타가 왔다.


엄마는 어떤 일에 감정이 상하면 자신의 인생의 흐름으로 확대 해석한다.

"나는 가족 안에서 편하고 싶은데 이렇게 자식눈치를 보는 게 너무 서럽다. 내 인생이"

다시 말하지만, 화장실 때문이다.

정말 생각해 보면 가족 안에서 가장 편한 건 엄마 아니었던가. 오빠와 나는 불편한 감정은 모두 통제되고 아버지는 가장 통제되는 사람이었으니.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는 사람은 우리 집에 한 명뿐인데.

화가 났다. 도저히 이런 환경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살아온 만큼의 나이만큼 한 번 더 살아도 그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끔찍함에 온몸이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입 밖으로 내버린 말은 "나도"

다른 말도 필요가 없었다. 자신이 하는 말에 모두 나도 그러하다고 했는데 엄마는 충격에 빠져 아버지와 함께 나가버렸다.

평소라면 극도의 불안함으로 이리저리 몸을 못 두고 발작처럼 사고를 멈췄겠지만, 그날은 그냥 온몸이 피곤해져 잠에 들었다. 30분이 지났을까. 엄마는 다 시들어왔고, 아빠의 말로는 엄마가 충격을 많이 받았고 이제 딸이 무섭다고 했다.


아무 행동도 더 이상 취하지 않았다.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은 내 행동은 엄마를 스스로 생각하게 했다. 그때의 얘기를 했던 적이 있었는데 엄마는 자신의 딸을 잃어버린 것 같아 며칠은 화보다는 충격이 커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픈 시간이 있어야 두터워질 시간이 함께 오는 것이니 물러서서 기다렸다. 이제 거기에 자신이 주무르기 편한 딸은 없다고. 자신을 마주할 때가 왔다고.


남들에겐 그저 작은 대답이었겠지만 오랫동안 절여진 내 마음엔 꼭 처음 담배를 피워본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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