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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희 Apr 03. 2024

너덜너덜한 오천 원 지폐

기묘한 자태와 둘 곳 잃은 시선

  한 씨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올챙이처럼 튀어나온 배 아래로 짧게 뻗어 있는 다리를 탈탈 털어댔다. 나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올 뻔한 위기를 갖갖으로 모면했다. 한 씨는 오래 서 있는 동안 불편했는지 오른쪽과 왼쪽 다리를 번갈아 가며 짝다리를 하면서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베트남 애들, 지네들 나라에선 돈을 못 벌거든……, 그러니 우리나라 와서 저러고 있는 거예요. 아니, 거 있잖아…, 티브이 못 봤어요. 베트남은 우리나라 칠십 년대 경제 수준밖에 안 된다니까요. 굶어 죽을 수가 없으니까 여기까지 와서 그러고 있는 거지. 안마 시술소 같은 데 전부 매춘 소굴이잖아요. 알고도 가고, 모르고도 가고……. 당장 먹고살 수가 없으니 도덕이고 뭐고 있겠어요. 돈만 준다고 하면이야, 뭐……. 배추 일 하는 남자들 애인이 전부 동남아 애들이지.


  나는 뭐라고 다음 말을 이어나가기가 애매해서 아무런 대꾸를 못 하고 있었다. 이런 경우 남자가 불쌍한 것 같기도 하고 여자가 불쌍한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도 여자도 모두 서로 애정도 없이 쉽게 취하고 쉽게 버리는 관계란 생각이 들면서도, 어째 도덕성을 나무라기엔 그들의 삶에 속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따로 묻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안타까운 사정들이 줄줄이 꾀어져 나와, 불륜이니 불법이니 하는 법의 잣대로는 규정할 수 없는 사연을 동정해야만 할 것 같았다.

  외출하려고 나왔던 한 씨는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자리를 뜰 생각을 하지 않고, 뭔가 더 얘기하고 싶은데 미처 하지 못한 사람처럼 우물쭈물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는 거추장스럽게 나온 배를 잡고 자세를 바로잡는가 싶더니, 아예 테이블 위로 배를 턱 하니 걸치며 이야기할 태세를 단단히 갖추는 것이다.

  게스트하우스 마당엔 커다란 가문비나무가 있고, 볕이 머리 꼭대기에서 비춰도 해를 피할 수 있는 그늘 자리에 나무로 짜인 야외 테이블이 오밀조밀 놓여 있다. 나는 앙증맞은 테이블 위에 한 씨가 배를 턱 하니 걸쳐놓은 기묘한 자태에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 ‘의자가 없는 것도 아닌데, 굳이 서서……. 툭 튀어나온 배를 숨겨도 시원찮을 판에 저렇게 대놓고 드러내다니.’ 나의 신경이 어정쩡하게 한 씨의 배로 쏠려 있을 때, 그녀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코로나가 터진 이후엔 중국사람들도 잘 없고 베트남이나 필리핀 사람들이 많이 와요. 거의 대부분이 불법 체류자들이죠.


  뉴스에서나 듣게 되는 ‘불법 체류자’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한 씨를 텅 빈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몇 해 전 중국인 인부들이 단체로 나의 숙소에 기거한 적이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중국인들이 들고 다니는 커다란 가스통과 웍이 먼저 떠올랐다. 그리고 유난히 오랫동안 기억을 붙들고 있는 것은 그들의 음식 재료였다. 그들은 마당에서 취사했는데, 승합차로 함께 이동하며 자신들이 먹을 음식을 모두 싣고 다녔다. 음식 재료들은 유난히 예사롭지 않았다. 순댓집에서 사 먹던 내장과는 분명 규모가 다른 어마어마한 양의 내장들을 푸른색 봉지에 넣어 다녔다. 티브이에서나 보던 쇠로 된 웍에 기름을 가득 부어 늘 무언가 지지고 볶았다. 질펀한 음식들이 중국 반점에서 사용하는 하얀 플라스틱 그릇에 담겨 게스트하우스 마당, 온종일 그늘 자리를 만들어 주는 가문비나무 아래, 테이블 위로 차려졌다. 그들의 식사 장면을 빤히 바라보는 게 실례가 될 것 같아서, 한 번도 제대로 쳐다본 적은 없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식사할 땐 되도록 드나드는 일도 삼갔다. 하지만 멀찌감치 바라만 봐도 테이블 위의 음식들은 한국인들이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음식으로 비치지 않았다.


  의도치 않게 그들의 식자재를 선명히 볼 수밖에 없었던 일이 있었다. 배추작업반들은 하루 일당을 놓칠세라 급하게 짐을 챙겨서 이동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외출을 한 사이 짐을 모두 챙겨 떠나버린 경우가 적지 않았다. 사실 이들이 게스트하우스에 머무는 동안에도 그다지 마주칠 일이 많지 않았다. 이날도 중국인들이 급히 떠나느라 인사도 없이 짐을 뺀 날이었다. 객실을 치우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그들이 미처 챙기지 못하고 남겨놓은 식자재를 보게 되었다. 작은 냉장고에 욱여넣은 푸른 비닐 속 내장들은 도무지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섬뜩했다. 평소 내장탕도 먹고 순대 간이며 염통과 허파까지 잘 먹던 나였지만, 조리되지 않은 거대한 내장들이 냉동 상태가 아닌 물컹한 날 것 상태로 담겨 있는 장면은 차마 눈 뜨고 보기가 어려웠다. 어렵게 손을 뻗어 핏물을 가득 담고 있는 푸른 비닐을 꺼내려다, 나중에라도 어떻게 되겠지 싶은 심정으로 다시 냉장고 문을 닫아 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전화가 걸려왔다.


  음, 우리 방 치웠어요? ……냉장고 음식 버렸어요? 음, 비닐에 있는 고기…….


  떠듬떠듬 한국말이 서툰 중국인의 음성이 수화기 너머에서 전해졌다. 아직 버리지 않았다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중국인은 곧 찾으러 온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들에겐 이 내장들이 얼마나 중요한 음식 재료인지 다시 숙소로 차를 돌려서 찾으러 오겠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중국인이 다시 오기로 한때 외출할 일이 생겼다. 푸른 비닐봉지를 상자에 담아 냉장고에 들어있는 아이스팩 몇 개를 함께 넣어 둔 뒤 안내대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전화를 걸어 알려줄까 하다가, 방금 나눈 어색한 대화가 떠올라 전화는 그만두고 숙소를 비웠다. 준표와 함께 숙소로 돌아왔을 때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식자재를 찾아갔는지 안내대 위에 상자가 보이지 않았다. 상자가 있던 자리에는 오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준표는 너덜너덜한 오천 원 지폐를 보더니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뭐야, 팁 남긴 거야. 자식들 웃기네. 팁을 남기려면 파란색을 남기던가……, 배추 뽑는 놈들이…….


  준표 너보다는 매너가 좋은 것 같은데 뭘 그래 인마. 난 왠지 짠하다.


  나는 땀에 젖어 너덜너덜해진 것 같은 오천 원짜리 지폐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오천 원이란 금액의 크기보다 팁으로 얼마를 남긴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그들이 가진 자존심처럼 느껴졌다. 외국인 노동자의 삶을 살면서 팁을 남길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생각하니 마음속에 어떤 아련함 같은 것이 스치고 지나는 것 같았다.


  한국에 머문 지 오래된 사람처럼 말을 잘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작업반장이 되어 노동자들을 직접 관리하기도 했다.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거나 팔다리에 문신을 새긴 앳된 청년들과 처자들, 식사 준비를 주로 담당하는 중년으로 보이는 여성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들 중엔 불법 체류자들도 있었을 것 같았다. 외국인노동자들의 문제가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그간 의식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합차에 짐을 잔뜩 싣고 다니며 무리를 지어 전국을 떠도는 행색이 초라한 노동자들. 늘 간편하다 못해 당장 버려도 아깝지 않을 만큼 허름한 작업복 차림인 사람들, 그 자체만으로 안쓰러울 따름이었는데 이런 시선이 불쾌감을 줄까 봐 그저 신경이 쓰였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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