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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희 May 02. 2024

트라우마

  지난밤 자율학습 시간에 있었던 일이 아침이 되어도 잔상으로 남아 있다. ‘떼로 몰려다니면 겁나는 게 없어?’ 이 말이 왜 거기서 나왔을까. 어제의 상기된 마음이 눈을 뜨자마자 다시 밀려든다. ‘그래 너도 참을 만큼 참은 거야.’ 복잡한 머릿속과는 달리 출근길에 보는 가로수길이 싱그럽다. 벚꽃이 진 자리에 돋아난 버찌와 가지를 뚫고 나온 잎사귀까지 모두 연두인 계절을 지나고 있다. 오늘만큼은 50분이 넘게 걸리는 출근길이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상기된 마음을 정리하기에 적당한 풍경과 거리다. 학교에 도착해 시간표를 확인해 보니 하필 첫 시간부터 3학년 수업이다. 어제 자율학습 시간의 장면을 목격한 학생들과 첫 수업부터 얼굴을 마주해야 한다. 어제의 목격자는 3학년 전체였다. 교과교실제로 운영되는 혁신학교다 보니 전체학년이 모두 모여 자율학습을 하는 날이 많다.

  교실 문을 열고 교탁에 교과서와 미니 마이크 세트를 놓는 동안 아이들이 조용히 너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 이 적막함의 이유를 알면서 모른 척 출석을 부른다.


  결석이 한 명도 없네. 좋아. 화법과 작문, 3단원 타인에게 감정 전달하기 펼쳐 봐.


  여전히 풀리지 않는 적막 속에 책장 넘기는 소리만 들린다. 어제의 여파다.


  분위기 왜 이래.


  너는 어색하게 시치미를 뗀다.


  쌤, 괜찮아요?


  너를 신뢰하는 서현이다.


  뭐가?


  선생님, 그렇게 화난 모습 처음 봤어요. 평소엔 엄청 친절하신데…….


  무슨 화를 냈다고 그래. 선생으로서 할 말 했을 뿐이야.


  쌤, 진짜 무서웠어요. 평소 쌤 모습이랑 너무 달라서 다들 놀랐잖아요. 근데 뭔가 사이다 느낌이었어요.


  전교 1등 미래다.


  야자에 늦었으면 혼나는 거 당연한 거지! 너희도 야자 우습게 생각하지 말고 신청했으면 착실하게 참여하도록 해. 수업하자.


  말은 그렇게 해 놓고 신경이 쓰인다. 미진과 함께 늦은 학생 중에는 평소 너를 잘 따르던 학생들도 여럿 있었다. 자칫 수업에 잘 참여하던 학생들이 이번 일이 앙금이 되어 수업에 흥미를 잃게 될까 염려된다. 수업을 마치고 내려와 보니 3학년 2반 담임에게서 메신저가 와 있다.


  '현수, 지은, 태익, 경민이 저한테 혼나고, 선생님께 사과드리러 갑니다. 잘 타일러 주십시오.'


  젊은 음악선생인 2반 담임이 발 빠르게 움직인다. 청소 시간이 되자 2반에서 온 아이들이 교무실 앞에서 기웃거린다. 너와 눈이 마주치자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교무실로 들어온다.


  선생님, 어제 죄송했습니다.


  아이들이 합창하는 것처럼 입을 맞춘다. 그런데, 현수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담임 선생님 등쌀에 여기까지 왔구나! 다음부터 시간 잘 맞춰 다니도록 해라. 현수는 남고, 너희들은 청소하러 가고.


  넵!


  아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밝게 대답한다.


  현수는 선생님이랑 얘기 좀 하고 가자.


  현수는 대답도 없이 조용히 너를 따라 공감 카페로 들어선다.


  그래, 현수는 뭔가 불만이 있어 보이는데? 할 말 있으면 해 봐.


  전 진짜 억울해요.


  한 마디를 겨우 뱉어놓고,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온 것처럼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나온다. 공감 카페에는 휴지도 없는데 난감하다.


  뭐가 억울해?


  떼 지어 다니면서 우리가 딴짓이나 하는 것처럼 말씀하셨잖아요. 우린 정말 과제 때문에 늦은 건데…….


  나는 너희들이 딴짓한다고 말한 적 없는데.


  제 말은 그게 아니라……, 그렇게 들렸어요.


  선생님은 무리 속에 있으면서 무책임해지는 걸 지적한 거야.


  저는 제가 꼭 나쁜 학생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요. 솔직히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어요.


  남학생이 이렇게 오열하는 건 처음 본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더니 가슴께가 들썩이도록 운다. 덩치만 컸지 속은 아직 어린애다. 속수무책으로 흐르는 눈물이 코로도 흘러내려 이야기에 집중할 수가 없다. 현수가 진정할 때까지 잠시 말을 멈춘다. 현수는 나무랄 데 없는 학생이다. 미진의 무리에 현수가 껴 있는 걸 보고 맘이 쓰일 만큼. 하지만 현수의 이런 반응은 좀 의외다.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은 무리를 지었을 때도 하면 안 되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대답이 없다. 현수는 여전히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평소 보지 못한 고집이다. 좀 더 다정하게 달랠 수 있지만, 그냥 내버려 두기로 한다. 억지로 이해하라고 강요하고 싶지 않다. 무리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덩치가 산만한 녀석이 너무 서럽게 운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억울한 마음은 없어질 거야! 그때 너 좀 부끄러울 거다.


  웃은 건 아니지만 한결 진정된 모습으로 현수가 꾸벅 인사한다. 감정선이 여리다는 생각이 든다. 현수는 타인으로부터 부정당하는 걸 견디지 못하는 것도 같다. 너에게 직접 말을 들은 미진이가 와서 눈물 콧물을 쏟아냈다면 그림이 이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생이 이 정도 말하면 보통은 마음을 풀어야 하는데……. 평소 현수의 모습을 비춰본다면 자기가 먼저 와서 용서를 빌 것 같은데 말이다. 그사이 2반 학생들이 내려왔다는 소문이 났는지, 3반에서도 아이들이 내려와 있다. 미진을 포함한 네 명의 학생이다.


  쌤, 어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애들이 줄줄이 내려와요?


  자율학습에 늦어서 담임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이러네요. 담임 선생님 선에서 충고하면 될 일인데…….


  아이들을 돌려보낸 뒤, 윤리 선생이 묻는다.


  얼마나 늦었길래요?


  30분요. 근데 말도 없이 늦게 와놓고 다시 공동과제한다고 나간다고 해서. 잔소리 좀 했어요.


  감독 선생들이 자율학습은 대충 눈감아 주고 하니까 애들이 버릇이 들어서 그래요. 다른 아이들도 보고 배우게 되잖아요. 좀 잡을 필요가 있죠. 근데 미진이 뒤끝이 좀 있을 텐데요.


  오늘 여러 번 마주쳤는데 인사도 안 하고 지나가 버리더군요.


  저런 애는 선생하고 겨루잖아요. 사람 봐가면서 행동해요. 빈틈을 보이면 안 돼요.


  다른 애들은 인사 잘하는 걸 보면 미진이 때문에 영향을 받는 것 같지는 않아요.


  자기 필요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살살거릴 거예요. 생활기록부 쓸 때 한 번 보세요.


  쌤, 저 먼저 퇴근할게요. 하루 종일 감정 노동을 너무 했어요.


  마침 교감 선생님도 자리에 안 계시네요. 얼른 가보세요. 고생하셨어요, 쌤.


  오늘은 양아의 중간고사가 끝나는 날이다. 평소 같았으면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중 뭐부터 듣겠느냐며 전화가 왔을 텐데, 조용하다. 점심시간에 운동장을 돌면서 전화를 기다렸지만 결국 휴대전화는 울리지 않았다. 많이 지쳐서 쉬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어차피 집에서 보게 될 텐데 그때 물어보면 될 일이다. 퇴근 후 집으로 와 보니 양아가 와 있다.


  양아, 중간시험 어땠어?


  몰라. 그냥 나 좀 내버려 두면 안 돼!


  양아가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버린다. 시험이 끝나는 날이라 상급반 수업이 없었다. 내일부터 다시 방과 후와 자율학습으로 채워질 것이다. 오늘은 정말 내버려 둬야 할 것 같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감정 노동은 도무지 끝나지 않는다.      


  '성적표 아이들 편으로 보냅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담임이 보낸 문자를 받았는데 며칠이 지나도록 성적표를 가져오지 않는다.


  여보, 양아가 성적표를 가져오지 않는다. 어쩌지?


  성적표는 나왔고?


  담임선생이 문자로 통보했어.


  성적이 예전만큼 나오지 못한 모양이네. 상급반 일정도 빠듯하고 따로 내신 준비할 시간이 없었잖아.

 

  도대체 얼마나 못 쳤길래 보여주지를 못하지.


  내가 한 번 물어볼게.


  남편이 양아에게 뭐라고 했는지. 양아가 순순히 성적표를 꺼낸다. 가방 안에서 얼마나 있었는지 모서리가 너덜너덜하다. 성적표만 던져두고 자리를 피해버린다.


  여보 이게 뭐야? 숫자가 잘못된 거 아니지.


  그래, 나도 보고 있어.


  아니, 국어만 겨우 90점 넘었고, 수학, 영어 평균이 20점 넘게 떨어졌잖아.


  또 공부하면 돼. 양아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암기 과목은 볼 것도 없었고, 그나마 고득점을 유지하던 국·영·수마저 성적이 떨어지고 말았다. 평소 같았으면 시험지를 가져와 보라고 했을 텐데 그럴 수준이 아니다. 야단을 쳐야 할지 위로를 해야 할지 고민이다. 양아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몇 번 노크해 봐도 기척이 없다. 양아의 방문을 열어본 게 언제인가 기억나지 않는다.      


  밤새 울었는지 이목구비가 사라졌다. 아침 식사도 통 못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성적 이야기를 꺼낼 수조차 없다.


  양아, 밥 좀 야무지게 먹어. 아침을 맨날 먹는 둥 마는 둥 하니까 힘이 없지.


  너는 선심을 쓰듯 위로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힌다. 그런데 양아의 얼굴이 아무런 반응이 없다.


  엄마, 아빠. 나 상급반 그만두면 안 돼?


  성적 때문에 그래?


  아니, 도저히 못 있겠어.


  넌 애가 왜 그렇게 나약해 빠졌니.


  나도 할 만큼 했단 말이야. 은솔이가 들어오고부터 그나마 나랑 말하던 아이들도 이젠 말도 안 해. 다 은솔이랑 붙어 다녀. 애들이랑 맨날 시시덕거리는 모습도 보기 싫고 자습시간에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면서 시끄럽게 하는 것도 싫어.


  그럼 선생님께 말씀드리면 되잖아. 그런 것까지 시시콜콜 다 알려줘야 해!


  엄만 도무지 말이 안 통해. 나 정말 미치겠단 말이야! 아악! 정말 미치겠다고. 모르겠어! 돌아버리겠다고! 아악!


 도대체 왜 이 불편한 소리와 모습이 낯설지 않은 걸까. 이 기시감은 무엇인가 말이다. 언젠가 TV 프로그램에서 봤던 장면과 다르지 않다. 죄인처럼 앉아 있는 부모, 그런 부모에게 정신 차리라며 가멸차게 조언하던 심리학자. 너는 콧방귀를 뀌며 그 모두를 혐오했다.


  짝!


  너를 향해 악을 쓰는 양아를 향해 힘껏, 손이 날아간다.


  얼굴을 감싸 쥔 양아가 바닥으로 주져 앉는다. 다시 악을 쓰고 울고, 정말 미치기라고 한 것처럼 아이는 진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김 양아, 너 그만 못해.


  남편이 소리친다. 양아는 머리를 감싸 쥐고 다시 소리 높여 외친다.


  아악!


  남편이 거실과 현관을 뒤지더니 구둣주걱을 가져온다.


  너 그만하라고 그랬지. 이게 무슨 버르장머리야!


  바닥에 주저앉은 아이를 힘으로 일으켜 세워 종아리를 힘껏 내리친다. 착! 착! 착!


  발뒤꿈치에 화살을 맞고 쓰러진 아킬레스처럼 양아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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