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해가 바뀌고, 저는 입사한 지 3년 차가 되었어요. 만으로는 이제 2년이 되어갈 시점이었죠. 제가 일하던 곳은 정부 보조금(국비, 지방비)을 지원 받는 청소년 상담기관이었어요.
그래서 1년에 5~6번 정도의 지도점검과 평가를 받았는데요. 보조금을 지원해주는 정부 주체에 따라서 평가 양식과 자료 제출도 달랐고, 보고 싶어 하는 항목도 달랐어요. 거의 두달에 한 번 꼴로 매번 새로 준비해야 했죠.
이제 만으로 2년이 되어가는 직원이 제일 선임으로 3개년 평가를 준비해야 했어요. 이제 입사한 지 6개월 조금 지난 동료 직원들과 함께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어요.
상담은 평가 자료를 준비하기가 참 애매해요. 상담을 받고 좋아졌다는 것을 수치화해야 하고, 상담을 통해 얼마나 성과를 냈는지를 보여줘야 하니까요.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정부 보조금이 들어간 사업은 늘 성공해야 하거든요.
당시에 저는 임신 초기 (2개월 정도)였어요. 임신을 확인하고 병원에 한두 번 정도 다녀왔을 때예요. 저는 임신 초기 입덧도 거의 없었고, 트러블도 없는 편이었어요. 아주 속이 매스껍고 울렁거리던 날들이 있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아주 수월했어요.
힘들면 언제든 먼저 들어가도 된다고 했지만, 모두들 야근을 하는 중에 그러기가 쉽지 않았어요. 더구나 이제 6개월 조금 지난 직원들은 입사하기도 전에 상황을 정리해서 평가 자료를 만들어야 해서 옆에서 말이라도 해주어야겠더라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제 스스로 그런 분위기에서 집에 오기가 어려웠고 내키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제가 가고 나면 다들 더 고생할 텐데 하는 생각에 퇴근하기가 마음이 불편했거든요.
무리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남편에게 야근을 하고 갈 테니 먼저 저녁을 먹으라고 연락했어요. 배가 단단해진다는 것이 뭉친다는 것도 이 때는 잘 몰랐네요. 남편도 힘들면 퇴근할 때 데리러 오겠다고 했죠.
그리고 조금 뒤에...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화장실에 갔어요.
뚝뚝...
하혈이었어요. 선홍빛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니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눈물이 났어요. 무서웠거든요.
가장 가까이 있었던 동료 직원에게 이야기하고, 남편과 함께 바로 산부인과 병원 응급실로 향했어요. 응급실에 전화해서 임신 주수와 증상을 말하며 물어보니 바로 오라고 하더라고요.
마음을 졸이며, 응급실에 도착했고, 이것저것 검사를 해보았어요. 다행히 출혈은 멈추었고, 자궁안에 피가 고여 있지만, 소량이라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는 소견을 받았어요.
병원에서는 원한다면 입원을 해도 되지만, 특별히 해드릴 것은 없다면서 집에 가서 무리하지 말고 푹 쉬어도 된다고 했어요.
링거를 맞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남편과 특 설렁탕으로 늦은 저녁을 먹었어요. 양가에서 오는 잔소리 랩소디 전화를 받느라 그날 밤은 쉴 틈이 없었어요. 양가 부모님 모두 걱정이 많으셨더라고요. 유일하게 저에게 뭐라 하지 않은 사람은 남편이었어요.
그날 야근은 굳이 하지 않았어도 될 텐데 집에 갈 수 없었던 것은 제 자신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결혼했다고 임신했다고 이리저리 일을 피하는 여직원이 되고 싶지 않았어요. 한 사람의 몫을 온전히 잘 해내는 사람이 되고 싶었거든요. 현실적인 한계를 인정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했다는 것이 이제는 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