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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6개월, 회사 이사

by 마잇 윤쌤

저는 임신 초기를 무사히 보내고, 임신 안정기에 접어들었어요. 임신 안정기는 의학 용어는 아니지만, 유산의 위험이 적어진 12주, 16주 이후를 말하죠. 그때부터 임신 후기 (28~40주)까지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지낼 수 있었어요.


저도 속이 매스껍고 울렁거리는 임신 초기를 지나 안정기에 접어드니 한결 컨디션이 좋아지더라고요.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며 지내는 것도 수월하고 할만했어요.


그러다 회사가 이사를 하게 되었어요. 미리부터 얘기가 나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부 보조금을 받는 청소년 상담기관에서 일해보니, 정말... 공무원 조직에서 안 되는 것은 없더군요. 말만 떨어지면 어떻게든 무엇이든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공무원 조직이었어요.


정말 빠듯한 일정이었지만(무조건 해 바뀌기 전에 이사하라고 해서), 동료 직원들과 힘을 합쳐 이삿짐센터를 부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은 나누어 해 나갔어요.


그 즈음에 저는 회사가 이사 가는 곳을 약도로 만들어서 홍보지와 안내지에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말이죠. 스스로 일을 만드는 직원이었네요.


하던 일을 끝내고 틈틈이 남는 시간에 인터넷으로 지도를 보고 약도를 만드는 방법을 검색했고, 하나씩 과정을 따라 하다 보니, 이사 가는 곳의 약도가 완성되었어요.


약도를 만드느라 조금 늦게 가는 날도 있었지만 완성하니 아주 뿌듯했어요. 함께 일하는 동료 직원들과 상사도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힘도 났고요. 덕분에 홍보지와 안내 지도까지 빠르게 만들 수 있었죠.


그 해 12월의 끝자락, 드디어 회사 이사 날이 되었어요. 상담실과 사무실이 전부라 짐이 그렇게 많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큰 오산이었어요.


책상과 책꽂이, 펜트리, 탁자, 시계 등, 이사하시는 분들이 가장 싫어하신다는 잔 짐들이... 끝도 없이 나오는 느낌이었어요.


부지런히 짐을 옮겨 싣고, 출발했어요. 이사하는 곳과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짐을 옮겨두고 다 같이 점심을 먹었어요.


다음날부터는 가급적 정상 업무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했기(휴관은 단 하루)에 오후 늦도록 모두 정리에 열심이었죠.


책상과 집기들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정리가 거의 마무리될 즈음에 컴퓨터와 내선 전화를 설치, 관리해 주는 기사님이 방문했어요. 전에도 자주 뵈었던 분이었는데요.


책상 밑에 들어가 콘센트와 컴퓨터 잭, 선을 연결하고 정리하는 것을 원래는 제가 잘 하는데요.


그날은 몸도 무겁고 좁은 곳에 엎드려 들어가기가 힘들어서, 다른 동료 직원에게 부탁했어요. 동료 직원도 흔쾌히 도와주었고요.


기사님이 지나가며



"혼자 잘 하면서 왜 부탁해요?!"



물어보다가 그제야 제가 임신 중이라는 것을 알아챘나 봐요.



"어!! 임신했었어요??"



깜짝 놀라서는 물어보더라고요. 진심으로 몰랐나 봐요. 다른 동료 직원들이 지금 6개월이 넘었다고, 배도 많이 불렀다며 기사님을 타박했어요.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냐면서요. 다 같이 까르르 웃으며, 설마 원래 배라고 생각했던 거야? 즐겁게 이야기했죠.


제가 너무 임신한 티를 안 냈나 봐요. 그때는 그저 그게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고만 생각했어요. 그렇게 힘들지 않다고 생각했거든요.


지나고 보니 제 스스로에게 너무도 가혹했던 것 같아요. 힘들어도 괜찮은 척 임신을 했지만 안 한 사람들과 동등하게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이사를 하고 다음 날 아침, 9시가 거의 다 되어 출근하는 것을 보며, 동료 직원들이 모두 어제 무리해서 못 일어났는 줄 알고 걱정했다는 걸 보고, 제가 무리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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