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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아웃, 모든 것이 불태워졌으면

by 마잇 윤쌤

2020년 1월, 새해 첫 월요일 아침이 되고, 후임 팀장의 전화를 받고서야 이제 제가 더 이상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실감이 났어요.


사실 저는 퇴사하고 회사에 몇 번 더 일하러 갔어요. 마지막 출근을 앞두고 독감에 걸려 상담과 놀이치료를 진행하던 아이들과 제대로 마무리를 못했거든요.


저를 응원해 주던 남편과 친구들도 지금 미쳤냐며 거길 왜 가냐며 강하게 반대했지만, 저는 가야 했어요.


가서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잘 지내라고, 선생님이 끝까지 마무리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더 좋은 선생님과 잘 이어서 하라고 인사를 해야 하니까요.



상사도 바뀌고 직원들도 많이 바뀌어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아주 불편한 시선을 견디며 한두 번의 상담을 더 하러 갔고, 1월 중순이 되어서야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어요.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겠냐는 주변의 만류에도 굳이 우겨 갔었기 때문에, 정작 마무리하고서 힘들다는 말을 할 수 없었어요. 그럴 줄 알았다는 이야기는 더 듣기 싫었거든요.


다시는 회사에 갈 일이 없어지고 나니 맥이 탁 풀리듯이 느슨해지는 기분과 함께 마음속이 텅 빈 기분이 들었어요.


8년여를 애착을 가지고 다녔던 회사와 이제 남남이 되었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았고요. 결국 이렇게 힘들게 퇴사하게 만들다니 서러움과 짜증, 노여움에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어요.



며칠은 멍한 기분으로 하루하루 시간을 죽이고 있었죠. 가라앉은 기분을 눈치채고 친구가 집 앞으로 데리러 왔어요.



친구의 차를 타고 도착한 교외의 한 카페,


얼굴이 왜 그러냐는 친구의 말에

대답을 하기도 전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어요. 따뜻한 라테 한 잔을 꽉 부여잡은 채 시작된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어요.



모든 것이 너무 원통하고 억울했거든요.

8년간 열심히 일했던 내 노력이, 내가 녹아서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았어요.



모든 것이 불태워 사라지면 좋겠다고, 일했던 회사가 망했으면 좋겠다면서 엉엉 울었어요.



친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말없이 부드러운 티슈를 넉넉히 챙겨주었고, 다 큰 어른이 꺼이꺼이 울어대는 통에 무슨 일인가 싶어 자꾸 쳐다보는 카페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도 그저 묵묵히 견뎌주었죠.



한참을 울고 난 뒤에 친구는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너의 경험이 어디 가지 않을 거야.

앞으로 더 좋은 날들이 많을 테니

걱정하지 마."

- 친구



이제 지난 일, 그곳에서 열심히 한 내 경험은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말이 큰 위안이 되더군요.



대충 월급만 받으면서 설렁설렁 일했을 수도 있었는데, 열심히 치열하게 일해온 것은 너의 선택이었다고, 회사가 오래오래 잘 되어야 너의 경험도 빛날 수 있을 거라는 말도 현실적으로 들렸어요.



이제 건강도 좀 챙기고, 가족들과 여행도 다니며 편안하게 지내라는 친구의 이야기가 그저 고맙더군요.



번아웃, 그 이후의 시간이 시작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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