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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는 '을'의 직업?

디자이너! 내 부하가 돼라 - 한수정

난 디자인이 하고 싶어 디자인과에 온 것이 아니었다. 학부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부터 디자인의 밀접함과 정교함을 피부로 느끼고 있지만, 적어도 그 이전에 디자인을 두고 크게 감탄하거나 두근거린 경험을 한 적은 없었다. 다시 말해, 디자인이라는 행위를 진로로 고민할 만한 유의미한 계기가 부족했다. 나는 그저 그림 그리는 것이 좋았고, 회화를 하기엔 그 경지를 이해하기 어려웠으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학과들 중 응용 분야가 가장 넓은 것이 디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입시 노선을 틀게 된 것뿐이었다.


디자인과 드로잉이 동의어가 아님을 뒤늦게 실감하며 붕 뜬 마음으로 디자인 전공생이 돼버린 나는 당연히 디자이너로서의 내 미래를 그릴 수 없었다. ‘결국 졸업하고, 취업하고, 일을 하면, 나는 평생 고객 앞에서 ‘을’인 디자이너로 일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와 같은 의문이 지속적으로 커져 갔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그리면서도 박수받고 싶었고, 내가 주관적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을 창작하면서도 자연히 공감받을 수 있기를 바랐다. 나 혼자만의 공상을 재미 삼아 그려왔지만, 현실의 디자인은 개인의 공상만으로 완성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소비자와 기업은 상사, 디자이너는 부하라 여기며 디자이너의 지위를 섣불리 규정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끊임없이 내 디자인 의욕을 갉아먹었기에 나는 내가 놓치고 있는 디자인의 정의를 재정립할 필요성을 느꼈다. 영상 디자인에 관심이 있다면 들어봤을 그래픽 디자이너 ‘솔 바스’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 적이 있다. “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냥 막연히 예술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발언은 디자인에 무지했던 과거 나 자신의 공상과도 일부 닮았다. 그러나 그는 차가운 현실을 몸으로 부딪힌 후, 대성하기 위해서는 각종 경제적, 사회적 압박 없이 자유롭게 활동하는 이상적 예술가가 아닌 타인의 평가 속 정체되지 않기 위해 무장하는 상업 예술가로서 나아가야 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분투한 끝에 확고하게 본인의 자리를 꿰찼다. 막연한 예술가로서의 목표에 그쳤다면 솔 바스는 평생 허울 같은 갑으로서 본인의 시야 안에서만 활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상업 예술가로서의 본인의 장래를 받아들이고 본인의 디자인관으로 소비자와 기업을 설득시킴으로써, 외부 간섭에 비교적 취약한 ‘을’의 디자이너에서 많은 클라이언트의 러브콜을 받는 진정한 ‘갑’의 디자이너가 되었다.


창작의 과정에서 하는 고뇌는 디자이너가 스스로 ‘을’이 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요소이지만 대중의 기대만큼만 부응하는 피상적 결과물을 산출하는 도구 같은 디자이너의 무력감에 비할 수 없다. 고심 없이 그럴듯하게 꾸민 아이디어가 다채롭고 수준 높은 평가를 불러오는 사례는 당연히 있을 수 없다. 독보적이라 할 수 있는 모든 아티스트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원하던 그림, 내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그림에 개인의 공상을 넘는 양질의 디자인 철학을 담을 때 그 그림이 박수받을 이유가 온전해지며 혹평 받을 이유가 타당해진다. 그 온전함과 타당함에서 오는 확실한 자부심 혹은 수긍을 얻었을 때, 디자이너는 결과물의 모든 부분의 주체로 선 ‘갑’이 된 자신을 마주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창작과 평가의 고통은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짧고 굵게 디자인을 경험한 지금의 내가 무기력한 이전의 나와 달라진 점은 디자인의 정의이다. 디자이너는 절대 독립적일 수 없다. 공급자인 디자이너가 있다면 수용자인 고객들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그러한 관계 속에서 디자이너는 긁어주는 자이다. 의식하지도 못했던 타인의 결핍을 끄집어내고 충족시키는 자이다. 항상 혁신적이고 고차원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 아닐지라도 새로운 경지의 편의, 안목, 아름다움을 개척한다. 그 대상이 외부의 질타를 받더라도 나의 정의가 바탕이 된 결과였다면 내 시야를 확장 시킬 수 있는 각성의 방아쇠가 되는 것이다. 지목하고, 채우고, 개척하고, 진화하는 자세는 수동보다 능동적 태도와 밀접한다. 최종적으로 강화된 나의 디자인 안목이 어제의 혹평하던 이들까지도 매혹 시킬 수 있는 수준이 된다면 그때의 디자이너는 더 이상 객체라 보기 힘들 것이다.


맨몸으로 맞닥뜨린 디자인에 대한 허상과 실상의 괴리로부터 도망치기만 한다면 진보할 수 있는 영역은 아무것도 없다. 목적의식 없이 이 분야에 발을 들였다면 발을 들인 이후에 그 구조를 해부하며 존재 이유를 정립하면 되는 것이다. 난 디자인이 하고 싶어 디자인과에 온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디자인과에 머물고 싶어 결국 디자인을 사랑하게 되었고, 디자이너의 내적인 지위 변동을 경험했다. 덕분에 개인의 공상을 벗어날 담력을 얻어 나의 영역 안에서만 나돌 때보다 훨씬 매력적인 그 너머의 산 경험을 거두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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