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하기로 결정한 월요일에, 회사에 퇴사한다고 이야기를 했다.
내가 16년 동안 다닌 회사고 이 회사를 다니면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너무 감사해서 이러면 도리가 아닌데, 급히 결정된 거라 너무 죄송하다 아이들 새 학기에 맞춰서 가는 거라 다음 주 수요일까지 근무하고 목요일에 이사를 가야 한다고, 대신 다음사람 구할 때까지 재택으로 일하겠다고 상무님께 말씀드렸다. 내가 생각해도 청천벽력이지 정말. 당황하신 상무님은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오긴 할 거라 생각했는데.. 라며 난감을 표하시면서 일단 알겠고 회의해 보신다고 하셨다.
상무님은 평소 내가 우리 회사의 최고의 복지라고 칭할 만한 좋은 분이시다. 사실 회장님의 사위이신데 그래서 더 회장님 편에 서지 않고 직원들 편에 서면서 회장님께 할 말을 하실 수 있는 분이셨다. 회장님께 맞추느라 직원들의 안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이전에 계시던 상사분들을 봐왔기 때문에 같이 일하는 직원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사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었으며 항상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분 역시 가족들이 제주에 있는 기러기아빠여서 나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 주실 거라는 마음에 말씀드리기가 조금은 수월했다.
이틀 후 수요일, 상무님께서 회사에서는 사람을 구하지 않을 예정이라고.. 혹시 가능한 날, 가능한 시간에 재택으로 근무하는 건 어떠냐고 하셨다. 나는 생각해 보겠다고 하고, 남편과 상의 후 내가 가능한 요일과 시간을 말씀드려서 결국 퇴사가 아닌 파트타임 재택근무를 주 3회 오후에만 일을 하는 걸로, 급여는 기존의 30%로 다시 계약서를 쓰게 되었다.
이렇게 퇴사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남편의 큰 그림이 완성되었다.
일 년간 쉬는 거야 그렇다 치고, 이후에 내가 다른 회사에 취직이 잘 될지 괜찮은 회사를 만날 수 있을지 사실 그 걱정이 가장 컸었다. 남편은 다시 돌아갈 것을 고려해서 무급휴직을 하겠다고 말하는 건 어떠냐고 했는데, 내 입장만 생각해서 어떻게 내가 먼저 그렇게 제안을 하겠느냐고 남은 직원들이나 회사로서는 새로 사람을 뽑아서 완벽하게 그 자리를 감당할 사람이 와서 일하는 게 나을 텐데, 무급휴직은 내 자리를 비워놓으며 고문을 주는 것 같아서 그건 내가 할 수가 없다고 했다. 혹시 너무 일이 많아서 일손이 필요할 때 있으면 재택으로 알바는 가능하다고 말씀드렸다고 했더니, 그래도 회사에서는 은희 씨를 잡을 것 같다고 그렇게 되면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이기로 우리는 이미 말을 맞추었었다.
남편에게 퇴사대신 재택근무의 소식을 메신저로 실시간으로 알리면서 쾌재를 불렀다.
은희 씨도 할 만큼 했으니 이제 못 이기는 척 덥석 대답하라고.
이사 준비는 바빴다.
회사에서는 인수인계를 하고, 애들 학원에도 다 알리고, 다니던 헬스랑 필라테스 회원권도 일주일 안에 양도해야 해서 당근마켓에 올리고, 우체국 택배상자를 주문해서 옷도 정리하고, 정말 정신이 없었지만, 사실 나는 무척 신났기 때문에 그런 건 문제도 아니었다. 바쁜 그 와중에 촬영용 고프로를 구매하기도 했다.
그리고 주소이전은 온라인 서비스가 잘 되어 있어서 일사천리로 남편이 신청했고, 제주로 오기 전에 이미 나는 제주도민이 되어 있었다. 실감도 안 나는데 벌써 제주도민이라니 이게 뭐람.
일주일 안에 짐을 꾸리고 택배를 보내고 제주로 내려오는 날 뒤를 돌아 집안을 바라보니..
아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밀려왔다. 처음으로 진지한 두려움이 살짝 드는 시점이었다. 진짜 가는구나.. 그리고는 집이 그리울까 봐 사진을 한 장 남겨두었다.
그리고 그때의 마음을 적어놓은 나의 메모
죄충우돌 우당탕탕
하루 전인 어제까지는 마냥 즐겁고 신났는데
출발하는 당일이 되니 약간 불안함이 엄습한다
과연 잘 지내다 올 수 있을까
적응력도 좋은 편이고, 생활력도 강한 편이라
뭐 어떻게든 꾸역꾸역 살아갈 수 있겠지만..
그런 거 말고, 잘 지내다 오고 싶어서다
거기까지 갔는데 잘 못지내는 건 아닐지..
팍팍하고 빡빡하게 살다 오는 건 아닐지..
마음으로는,
여유롭게 지내다 오고 싶은 소망이 있다
결정이 어렵지 나머지는 금방이다.
목요일에 제주로 오자마자 바로 아이들 학교에 가서 전학수속을 마치고, 나의 재택근무용 데스크톱과 듀얼모니터를 구입하고, 그 밖에 필요한 것들은 다이소와 하나로마트를 들러서 털어 왔고, 당근마켓을 여러 번 이용했다. 또 집의 구조를 살기 편한 방식으로 바꾸고, 아이들 자는 방에 침대랑 매트리스, 일 하는 책상방에 책상4개, 안방에 침대랑 매트리스 이렇게 두기로 했다. 서울집에서 정말 최소한의 짐만 챙겨 오면서 불편하더라도 이방인의 삶, 유목민의 삶으로 1년은 지내보자고 생각했다.
다음날 하루는 짐을 대충 정리했고 그 다음 날, 대망의 런데이!!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전 날 미리 준비해 둔 러닝용품들과 고프로를 챙겼다.
생각해 보면 달리기란 그저 운동화를 신고 가볍게 다녀올 것 같은데, 짐이 생각보다 많다.
상의, 하의, 바람막이, 스마트워치, 양말, 발목보호대, 운동화, 러닝벨트, 모자, 물, 그리고 촬영용 고프로, 충전됐는지까지 확인.
첫 러닝코스를 정하기까지도 고민이 많았다. 여길 가야 하나 저길 가야 하나.. 결국에는 새벽에 운전해서 가다가 즉흥적으로 결정했는데, 그곳은 얼마 전 여행차 와서 달려봤던 최애코스인 논짓물에서 대평포구였다. 사실 여기 말고는 가본 곳이 없었고 내가 아는 한 여기만 한 곳도 없었다.
아무튼 머리에 쓰는 방식으로 고프로를 처음 모자 위에 올리고 달리기를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쟤 뭐야? 하는 느낌으로 쳐다보는 것 같았다. 생소하고 뭔가 부끄럽고 어색했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겨내야지. 미친 척해야지. 나는 쉘위런이니까. 나는 이걸 찍어야만 하는 사명감이 있으니까. 과연 누가 준 사명감이 냐마는..
집이 제주도 서귀포 중문 쪽이어서 그 지역 중에서 내가 알던 가장 멋진 코스로 시작했는데 마침 해가 뜨고 있었다. 바람과, 온도와, 바다냄새와, 멋진 일출까지. 너무 꿈만 같았고 행복했다. 이제 매일 여기를 올 수 있다니, 이 멋진 곳을 달릴 수 있다니. 세상에 나처럼 행복한 사람이 또 있을까.
그 순간만큼은 내가 세상 최고로 행복했다.
며칠 후 그날 찍은 영상으로 나의 첫 유튜브에 올릴 영상편집에 돌입했다.
참고로 나는 완전 쌩초보는 아니고 20여 년 전에 영상편집에 관심이 있어서 캠코더로 촬영도 하고, 프리미어라는 프로그램으로 편집을 접해본 경험이 있다. 대한적십자에서 이산가족 찾기 영상을 만든다고 촬영 및 편집하는 사람들을 구하길래 한번 참여해보기도 했다. 그때 나는 나중에 영상편집의 미래가 괜찮을 것 같아서 영상편집회사에 면접을 보기도 했으나, 그 회사에서는 이쪽은 늘 야근이고 힘든데 네가 지금 다니는 그 회사가 안정적이고 나아 보이니 거기를 다니라고 되돌려 보내서, 그 후로는 마음을 깨끗이 접었고 그렇게 20년이 지났다. 나는 야근도, 밤샘도, 힘든 걸 싫어했다.
그렇게 20여 년 만에 영상편집을 하려니 요즘은 어떻게 하는지 네이버랑 유튜브를 찾아보다가 무료라고 하는 '필모라'라는 프로그램으로 결정했는데, 이것저것 눌러보며 익혀가며 힘겹게 완성을 다 한 후 저장하기를 눌렀더니, 돈을 내라는 거다. 갑자기? 허 이거 너무하네. 무료라면서, 미리 알려줬어야지. 내가 얼마나 고생해서 만들었는데. 눈물을 찔끔 흘리며 고생고생 만들어둔 영상이 날아갈까 봐 아까워서 육만 얼마를 결재했다. 그래 내가 일 년간 쓸 프로그램이니 이 정도 투자해야지라고 당위성을 부여하며.
그 후에 영상을 두세 개 정도 작업한 후에 알게 됐는데... 결재하고 사용하길 참 잘했다는 엄청난 장점이 있었다. 그것은 2000년에 머물러 있던 내게는 가히 신세계였는데 바로 템플릿이라는 것. 내가 인트로, 자막, 마지막 부분까지 만들어 둔 전체적인 틀을 저장하고 다시 꺼내서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 다음에 새로 찍은 영상만 바꿔 넣으면 전체적인 형식이 거의 갖추어져 있어서, 새로운 자막만 넣으면 되는 그야말로 신세계다. 2024년의 내가 너무 라떼 아줌마인가 싶지만.
영상을 다 만들고 나서 유튜브에 업로드하니 썸네일을 올리라고 한다.
아 썸네일.. 사실 이 용어도 알게 된 지 오래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썸네일을 만들 수 있는 프로그램을 찾아보았다. 전에 유튜브 하는 법에 관한 영상을 보니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던데, 그중 적당한 사이트를 찾아서 들어가 보았더니 이것도 정말 신세계다.
이것도 전에 배워두었던 포토샵이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기본적인 템플릿이 엄청 많고, 텍스트나 효과 등 여러 가지가 가능해서 요즘은 유튜브나 편집이 참 수월한 시대구나 싶었다. 예전엔 포토샵이나 프리미어를 다룰 줄 안다는 것 자체로서 약간의 특권의식까지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짝에 쓸모없는 것처럼 되어 버렸다. 물론 기본적으로 포토샵과 프리미어를 할 줄 알아서 다른 편집프로그램을 시작하는데 도움이 되긴 하지만.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을 투자해서 첫 동영상을 업로드했다.
뿌듯하기도 하지만 부족한 부분이 보여서 부끄럽기도 하다. 화면이 너무 어둡다거나, 날씨가 좋지 못하거나, 시선이라던지.. 등등 이다음에 두 번째, 세 번째부터는 보완하면서 차차 나아지겠지.
영상은 나는 나오지 않고 달리는 제주의 풍경만 나오기에 아름다운 제주를 같이 달리는 기분으로 실내에서 러닝머신 하면서 보면 좋을 것 같은 컨셉이었다. 과연 쉘위런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결국 1년 후 다시 서울로 돌아가서 나만 보고 있는 거 아니야? 뭐 그렇게 되더라도 나에겐 너무나 소중한 추억이고 다시없을 귀한 자산일 것 같다.
이렇게 어리바리한 유튜버 쉘위런의 첫 단추가 끼워졌다.
[링크] Shall we run - 1. 제주 논짓물에서 대평포구까지 왕복 7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