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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쉘위런 Aug 07. 2024

제주에는 나를 위한 러닝 크루가 준비되어 있었으니..

그 이름하여 C2O  

1983년생, 40이 넘은 나는 지금까지 동호회에 든 적이 없다. 

대학 다닐 때 자취를 했던 나는 자전거를 타고 동네 한 바퀴를 다니는 걸 좋아했는데, 동네에 친구도 없고 심심해서 자전거 동호회에 들어가 볼까 생각했지만 타지에서 사는 스무 살 여학생은 세상이 무서워서.. 결국 실행하지는 못했다. 


혼자 살고 있는데 사생활이 노출되는 것도 꺼려지고, 이상한 사람이랑 엮이면 곤란하니까. 눈치도 있는 편이고 이상한 낌새도 금방 알아차리는 나는 세상엔 이상한 사람이 많다는 걸 일찌감치 깨달아서 미리 조심하고 경계하며 살았던 것 같다. 


나는 귀신보다 사람이 무서웠다. 

고등학교 때 시골 할머니 댁에서 잠깐 살았던 적이 있었는데 바로 아랫집에는 동네바보가 혼자 살았다. 원래는 내 친구네 집이었고, 그 동네바보는 내 친구의 삼촌이었는데, 어느 날 그 삼촌만 두고 온 가족이 이사를 가버렸다. 내가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밤에 버스정류장에 내려서 십 분쯤 걸어가야지 나오는 할머니 집까지 가는 동안 동네바보는 멀찌감치서 나를 따라온 적이 있었다. 너무 무서워서 그 후로 나는 밤에 버스에서 내리면 할머니께 전화해서 데리러 오라고 꼭 전화를 한 후에 같이 집에 가야 했다. 동네바보가 해코지한 적은 없었지만, 정상이 아니었기에 내가 조심하는 편이 나았다. 언젠가 할머니가 집에 안 계셔서 혼자 잤던 날에는 덜덜 떨며 창호지 얼기설기 붙어 있는 문 같지 않은 그 문들이라도 꼭꼭 다 걸어 잠그고 잤는데, 뒷산에 부는 바람에 창문이라도 덜컹 흔들리기라도 하면 사람이 쿵쿵하는 게 아닌지 잠도 안 오고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이런저런 연유로 귀신보다 사람이 무섭다는 걸 일찍이 알아서 또라이를 만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살았다.  






그러던 내가 40대가 되었고, 러닝을 했고, 제주에 이사를 왔고, 러닝 유튜브를 하게 됐다. 

나의 유튜브는 매번 다른 러닝코스를 올리는 콘텐츠라서 러닝코스나 정보들이 필요했던 찰나, 이사 후 필요한 물품들을 당근마켓에서 찾다가 우연히 서귀포러닝크루라는 모임정보를 보게 되었고, 오 당근에도 크루가 있었네? 하고 관심이 생겨서 용기를 내어 들어가 보았다. 스무 살 적 무서워서 들어가지 못했던 은희는 이제 마흔 살이 넘었고 동호회가 필요했다. 


당근에서 몇 군데 크루들을 쓱 훑어봤는데 20-30으로 나이제한이 있는 곳도 있고, 어떤 곳은  사람이 별로 없고 활성화되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내가 들어가기로 결정한 C2O(씨투오)는 나이제한도 없고, 정기적으로 주2회정도 서귀포 월드컵경기장이나 그 부근에서 모임이 있어서 한 번쯤 가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정했는데 제주생활 중에서 그 크루를 알게 된 것이 너무나 감사할 따름이다. 지금까지도, 오늘까지도 나는 그 크루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보면 나를 위해 준비된 크루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기도 한다. 아직 제주살이 1년이 다 지나지는 않았지만, 반년쯤 흐른 오늘도 나는 그 크루에 참석에서 새벽 6시에 함께 달리고 훈련을 했다.  


C2O(씨투오)라는 이름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서 언젠가 크루의 대장에게 물어보니 한글 디귿, 리을, 미음을 영문과 숫자로 표기했다고 한다. 아 디지털 전자시계에 C2O 가 보인다면 ㄷ ㄹ ㅁ 으로 보이겠구나. 제주 방언으로 놀멍, 쉬멍, 달리멍 의 'ㄷㄹㅁ'으로, 달리면서 함께 하자는 의미이다. 쎈스있네. 


내가 크루의 단톡방에 들어간 지 며칠 후 새벽번개러닝이 있었는데, 월드컵경기장에서 할지, 중문에서 할지 장소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 중에, 중문에서 하면 저도 참석 가능하다고 한 표를 던져서 장소를 우리 집 근처로 픽스하게 되었다. 


이상한 사람이 있으면 어쩌지? 

내가 너무 못 달리면 어쩌지? 

옷은 뭘 입지? 운동화는? 

이런저런 걱정과 생각에 잠을 편히 못 잤다. 


나의 첫 동호회 활동, 낯선 사람들과 첫 달리기를 하러 나가는 날. 

3월 27일 수요일 새벽 6시 반, 집 근처 중문 하나로 마트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걸어가도 될 거리지만 일단 차를 끌고 나가서 주차를 했다. 남편이 사줬던 제일 좋은 러닝화, 그나마 가지고 있는 것도 단 두 개뿐이지만, 제일 제일 좋은 비싼 러닝화를 신고, 그 운동화랑 깔맞춤의 형광핑크색 바람막이를 입고 나갔다. 지금 생각하면 형광돌이가 부끄러운데 그때 내가 가지고 있던 바람막이는 그것뿐이었다. 3월 말은 아직 좀 쌀쌀해서 안에는 적당히 따뜻한 반폴라를 입고, 더우면 언제라도 바람막이 지퍼를 열어 땀을 식힐 준비를 하고, 러닝벨트랑, 스마트워치까지 완벽히 셋업 했다. 


첫 모임에는 남자 세 분이 오셨다. 동네 한 바퀴를 돌며 이 얘기 저 얘기를 했는데, 두 분은 식당을 하신다고 하셨고 한 분은 지금은 일년살이를 하시는 중이라고 하셨는데 다들 친절하고 나의 페이스에 맞추려고 배려해 주셨다.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오니 긴장하고 굳어져 있던 마음이 조금 녹는 것 같았고, 혼자였으면 중간에 무조건 걸었을 마의 오르막길 구간을 쉬지 않고 올라올 수 있었다. 이것이 크루의 힘인가. 자주는 아니더라도 러닝코스도 알아볼 겸 가끔 한 번씩 참석해 봐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원래 이 크루는 늘 월드컵경기장 부근에서 정기모임을 하는데, 이 날이 중문에서의 첫 러닝이었다고 한다. 


늘 혼자 달리던 내가 처음으로 세명과 함께 달린 날의 기념사진과 그 코스, 나중에는 열다섯 명 이상도 같이 달린 날이 있었다.






중문 첫 러닝 이후, 종종 중문에서 새벽 6시에 모닝런, 일명 우리 크루에서는 '부지런(run)'이라고 부르는 새벽 번개런이 자주 열렸다. 내가 크루에 들어가기 전 그 크루에는 중문에 사는 사람이 한 분 계셨는데, 그분은 식당을 하셨고 이전에도 주짓수나 스쿠버다이빙 등 운동을 꾸준히 해오신 선수출신의 전문 마라토너 느낌이었다. 그분은 크루에서 서포터로 활동하시면서 간혹 번개런을 올렸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매일매일 부지런을 올리고 계셨다. 


그분께서 부지런을 한 지 한 달이 되었다고 하신 날,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를 위한 크루에, 나를 위한 전문가에, 나를 위한 새벽러닝이, 우리 동네에서..  

배우 황정민의 유명한 수상소감이 생각난다. "잘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들었다". 


제주에서 나는 화수목 오후에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회사에서 나에게 원하는 날 원하는 시간에 근무를 도와달라고 했을 때, 종종 서울 갈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월요일과 금요일은 제외시키고, 새벽에 러닝하고 애들 학교 보내고 오전에는 자유시간을 보낼 생각으로 화수목 오후에 근무를 하기로 결정했는데, 때문에 이 씨투오의 부지런은 나의 패턴에 안성맞춤이었다. 


멀리도 아니고 중문에서 새벽러닝이라니, 내가 하고 싶은 날에 마음이 동하면 나가서 같이 뛰면 그만이다. 나의 주 3-4회 정도 러닝 스케줄에서 나의 훈련이랑 부지런의 스케줄이랑 맞으면 참석해서 같이 달린다. 많으면 다섯 명도 있고 적으면 두 명. 그동안 씨투오에서 케이던스(발걸음 속도)나 마라톤에서 앞사람 앞질러 가는 방법, 러닝 전 스트레칭, 드릴 등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수다 떠는 게 재밌기도 하고,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들을 함께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중문 부지런을 이끄는 서포터님에게 한 달 기념으로 커피쿠폰을 보내드렸다. 본인이 좋아서 하시는 거겠지만 그 최대수혜자는 바로 나라고, 감사하다고. 게다가 그분은 사진도 멋지게 잘 찍어 주신다. 


이후 씨투오에서의 새벽 5시 동트기 전 한라산 영실코스 오픈런, 비 오는 날 숲길 달리기, 러닝 후 야외 요가, 가수 션의 아이스버킷 챌린지 10K 마라톤에 함께 참여, 여름에는 러닝 후에 바다로 풍덩 하는, 이제 슬슬 그 이야기들을 풀어갈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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