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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탕진해야 하는 선물이다

by 식물감각

어느 날, 와인을 따르다가 멈췄다.

잔에 담긴 루비 빛이 아름다워, 도저히 마시기가 아까웠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사람은 어떤 감정 앞에서 망설일 때, 사실은 그걸 가장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것을.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아껴 두려 하고, 남겨 두려 하고, 마지막 한 방울을 쉽게 놓지 못한다.

그러나 와인이든 인생이든 잔에만 머물게 하면 결국 식는다.

삶은 마셔야 한다. 전부. 남김없이.

삶이 빛나려면 가끔은 선을 넘어야 한다.

하루의 신성함은 한 잔의 와인처럼 시작된다.

그 한 잔을 위해 우리는 경제적 구속과 통속적인 상식과 도덕적 권태로움에서 잠시 벗어나야 한다.

내 욕망에 시간을 소비해 보자.

그게 바로 우리가 이따금 해야 하는 일이다.

봄은 스스로를 소진하면서 생명을 끌어올린다.

이렇듯 탕진은 생명력의 또 다른 이름이다.

삶이 권태로운 이유는 우리가 자신을 충분히 소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꽃이 향기를 남기듯, 인간도 흔적을 남기려면 스스로를 다 써야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랑도, 어떤 선택도,

기꺼이 탕진한 자만이 안다.

그 시간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수익은 계산되지만 삶은 감각된다.

내가 투자로 얻은 것은 숫자가 아니라 용기였다.

한때는 매일 차트를 붙들고 감정을 단속했지만,

결국 나를 흔들고 남은 것은 돈이 아니라 내가 살아낸 온도의 기록이었다.

나는 사랑하듯 투자했고, 기도하듯 기다렸으며, 술에 취하듯 때로 무너졌다.

하지만 그 모든 흔들림이 내 안에 어떤 향기를 남겼다.

투자의 성패는 지워지지만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를 남는다.

남겨야 한다는 강박은 두려움이다.

아껴둔 감정은 굳어버린다.

표현하지 못한 사랑처럼,

실행하지 못한 선택처럼,

그 모든 ‘남김’은 결국 사라진다.

진짜 인생은 절제가 아니라 용기다.

나는 이제 수익에 집착하지 않는다.

감정을 남기고, 향기를 남기고, 계절의 감각을 남긴다.

그 감정들이 내 인생의 시그니처가 된다.

내가 지나온 투자, 내가 마신 와인, 사랑한 사람들

그 모든 탕진이 나를 빚었다.

잔을 비운다는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텅 빈 잔에 비로소 채워지는 것은 진심이다.

그리고 살아 있다는 감각.

나는 더 이상 ‘아껴 두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

그날이 왔을 때, “나는 전부 마셨다”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탕진해야 비로소 선물이니까.

오늘은 에세죠(Echézeaux 2001)를 마셔야겠다.

앙리 자이예의 철학을 계승한 조카,

에마뉴엘 루제가 만든 피노 누아의 시.

앙리 자이예(Henri Jayer)는 명성보다 흙을, 부보다 한 잔의 황홀을 택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와인은 미래의 상품이 아니라, 현재의 선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비법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와인 제조 비법을 아낌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앙리 자이예가 작고한 지금에 와서 그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수확량은 극단적으로 줄였고,

결점 있는 포도는 한 알도 용납하지 않았다.

발효 전 긴 저온 침용으로 색과 향을 조심스럽게 뽑아냈고,

여과 없이 병입 했다.

그 결과 피노 누아가 도달할 수 있는 관능의 정점을 보여 주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피노 누아의 시인’이라고 불렀다.

그는 말했다.

“포도밭에서 모든 것이 결정된다.”

그 철학은 루제에게 이어졌다.

2006년 9월 20일, 자이예는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이미 완벽한 계승자를 준비해 두었다.

조카 에마뉘엘 루제(Emmanuel Rouget)였다.

루제는 삼촌의 밭에서 흙을 만지며 철학과 기술을 몸에 새겼다.

포도밭의 숨을 죽이지 않고 되살리는 법, 과실과 구조의 균형을 잡는 법,

와인을 ‘소유’가 아니라 ‘향유’로 만드는 법을 배웠다.

루제는 자이예의 방식 그대로, 그러나 자신의 세련된 감각을 더해 와인을 만들었다.

그 전승의 정수가 깃든 한 병이 내게 있었다.

에세죠 에마뉴엘 루제 2001(Echézeaux Grand Cru Emmanuel Rouget )

마개를 열면, 시간의 향이 풀린다.

라즈베리와 체리가 아직 붉은빛을 잃지 않았고,

장미와 제비꽃의 부드러운 손길이 겹겹이 얹혀 있다.

숙성이 남긴 송로버섯과 흙 내음, 삼나무의 고요한 깊이가 따라온다.

이 병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다.

그 안에는 자이예가 가꾼 흙과 햇빛, 루제가 이어간 철학,

그리고 세월이 빚은 우아함이 함께 담겨 있다.

라벨에는 루제의 이름이 선명하지만

이 와인은 사실상 앙리 자이에의 피가 흐르는 와인이다.

이 와인을 마신다는 것은

미래를 위해 남겨둘 수도 있었던 보물을 ‘지금 이 자리에서’ 푸는 일이다.

삶이 ‘탐닉’이 아니라 ‘탕진’이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결국, 이렇게 완벽한 선물을 남김없이 마시기 위해 살아간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닫는다.

인생의 가장 큰 부는 모은 것이 아니라, 다 써버린 것이었다는 사실을.



� 스월링 노트 | 삶은 탕진해야 하는 선물이다

1. 인생은 계산보다 감각이다.

진짜 삶은 남긴 것이 아니라 온전히 누린 것에 의해 정의된다.

2. 투자도 마찬가지다. 전부 걸어본 자만이 배운다

시장에 반쯤 걸친 마음으로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한 번쯤은 전부 걸고, 전부 잃어보고, 전부 느껴보아야 한다.

그렇게 탕진한 자만이 진짜 자신과 마주한다.

3. 남김은 조심이 아니라 두려움이다

아껴둔 감정은 굳고, 실행하지 않은 선택은 사라진다.

4. 빈 잔에 진심이 담긴다

비워야 향이 피어난다.

삶의 풍미는 남긴 자가 아니라 전부 마신 자에게 주어진다.

5. 가장 아름다운 투자는 삶을 드러내는 것이다

와인 한 병처럼, 인생도 전부 마셔야 한다.




� 추천 와인 : 에세죠 에마뉴엘 루제(Echézeaux Grand Cru Emmanuel Rouget 2001)

생산지 : 프랑스 부르고뉴 코트 드 뉘 에세죠 그랑 크뤼

품종 : 피노 누아 100%

스타일 : 미디엄 바디 실크 같은 탄닌 복합적인 향. 관능적이고 우아하다.

� 테이스팅 노트

에세죠 에마뉴엘 루제 2001은 부르고뉴의 깊은 혼과 관능을 응축한 한 잔이다.

잔에 따르면 투명하면서도 농밀한 루비 레드가 가넷 빛 가장자리와 어우러지며

세월의 성숙미가 고요히 드러난다.

잘 익은 체리, 라즈베리, 레드 커런트가 생생하게 퍼져 나오고

뒤이어 자두와 은근한 크랜베리의 산뜻함이 레이어를 이룬다.

시간이 흐르면 장미꽃잎, 바이올렛, 오렌지 껍질의 아로마가 피어오르고

그 위로 삼나무, 흑연, 스파이스, 미묘한 송로버섯과 젖은 흑 내음이

시음자를 숲 속으로 이끄는 것 같다.

첫 모금은 실크가 혀 위에서 미끄러지는 감촉이다.

산딸기와 체리의 산뜻한 과실미가 입안에서 춤추고,

감초, 다크 초콜릿, 은근한 허브와 향신료가 깊이를 더하며 산도가 신선하게 리듬을 불어넣는다.

중후하면서도 투명해 긴장감을 유지한다.

탄닌은 매끄럽게 녹아있지만, 뼈대는 여전히 곧다.

피니쉬는 길고 영롱하며 붉은 과실과 플로럴, 미네랄리티가 관능적으로 입안을 감싼다.

한 편의 시가 끝난 뒤 남는 리듬처럼.

� 추천 이유

에세죠 루제 2001은

‘소유’가 아니라 ‘향유’의 철학을 증명한다.

병 속에 닫혀 있을 땐 자산이지만 열려야만 선물이 된다.

그 순간 와인은 완성되고, 인생은 증명된다.

소유보다 향유, 이것이 진정한 부의 형태다.

우리 시대 가장 위대했던 와인메이커 앙리 자이예는 이제 전설이 되었고,

그의 와인은 생산되지 않는다.

이 한 병을 열면 그것은 더 이상 미래의 자산이 아니라 지금의 축제가 된다.

그리고 그 축제는 한 세대가 남긴 전설을 나의 혀끝으로 옮겨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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