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나는 슈퍼 '을'일뿐
농산물을 가꾸는데 가장 1번째 서열은 하늘이다.
비가 오거나 덥거나 춥거나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하늘의 영역.
하여 나는 순위가 뒤로 밀려난다.
그럼 날씨를 제외해서 2순위는 되는가 하면 그도 아니다.
텃밭이라고 하기엔 크고 요즘처럼 몇 만 평씩 하는 대농들이 보기엔 우스운 오묘한 평수의 밭을 유지하려면 삽질만으로는 버겁고 잠깐이라도 기계의 힘을 빌려야 한다.
이 기계를 가지신 분들이 2순위다.
컴바인, 트랙터, 경운기 이 묵직한 장비들이 단 30분도 안 되는 시간이면 제 할 일을 다 할 평수인데 그걸 직접 하려면 2~3일은 꼬박 해야 하는 터라 언제나 굽신굽신 그분들의 처분을 기다릴 따름.
그도 그럴 것이 그분들도 본인들의 농사가 우선이고 우리는 도움을 받는(물론 소정의 비용을 지불하지만) 입장이니 와 주시기만 해도 감지덕지이지만 마냥 뒤로 뒤로 순서가 밀릴 때에는 애꿎은 모든 것에게 속상함을 토로하게 된다.
이제 땅을 갈아서 월동하는 마늘과 양파를 심어야 한다.
트랙터 기사님과는 2주 전에 연락을 드렸고 이번주에 갈아주마 말씀하셨는데 주말이 되어가도록 감감무소식.
우리만 이렇게 애탈 것이 아닌지라 닦달 전화 한번 못하고 기다리는데 이것이 스트레스받는 이유는 언제 올지 모르는 트랙터의 진입로를 모두 열어두어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좋은 볕에 들깨를 말렸으면 싶은데 정말 언제라도 와서 휘리릭 갈아버릴 수 있다 보니 트랙터가 지날 수 있는 모든 통로를 열어두고 남는 공간 내에서 눈치 보며 말려야 하는 미션이 생겼다.
밭을 갈고 난 다음이면 모든 햇볕 잘 드는 넓은 공간이 다 들깨 말릴 장소가 되는데 트랙터 길을 제외해서 볕 잘 드는 모퉁이들을 찾아 옮겨 다니다 보면 불쑥불쑥 화가 나는 거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나는 3순위인데 내가 삽으로 흙을 기경할 수 없을 바에야 이리저리 옮겨가며 햇볕 따라서 말려야 할 뿐 하여 순위가 밀리면 정말 몸이 고생인 것이다. 1순위인 맑은 하늘의 허락을 받고 2순위인 기계 가지신 분들의 상황에 맞게 나는 계속 움직여야 되니.
하긴 비단 농사만 그런 것도 아니다.
아이들 문제도 그렇고 시댁 문제도 그렇고 친정 문제도 그렇고 내가 1순위가 된 적은 거의 없다.
시부모님 먼저, 아이들 먼저, 신랑 먼저. 엄마 먼저.
계속 슈퍼 을로 살았으니 자연스럽게 적응을 잘할 듯싶지만 이건 한다고 적응되는 류의 패턴은 아닌 듯하다.
그저 모든 원망과 힘듦을 나만의 대숲들에게 소리칠 뿐. 오늘은 나의 대숲이 쪽마늘이었다.
내가 순위를 바꿀 수 없다면 현재 순위에서 할 수 있는 해소방법을 찾아내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될 터이다.
하여 나의 모든 농산물들은 내 대숲이자 상담가가 되어 준다. 그나마 텃밭을 하면서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건 판단하지 않고 오롯이 들어주는 열성적 상담가들이 꽤 많이 있어서일 테다. 고구마도 호박도 옥수수도. 그저 잘 들어준다. 말이 소문을 만들어 내 푸념이 더 큰 사단을 만드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해서 나는 오늘도 트랙터 기사님의 이야기를 마늘에게 했고 내일쯤 웃으면서 확인 전화도 드려볼 수 있을 듯하다.
슈퍼을로 잘 살아나가려면 그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