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의 노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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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조선건국 200년만에 처음 있는 전쟁이었다. 선조는 한양을 떠나 피난을 갈 결심을 했고, 나라의 앞날을 생각하여 세자를 책봉해야만 했다. 그렇게 광해군은 조선의 세자가 되었다. 광해군은 난중에 세자가 되어 책봉 의식도 치를 수 없었다. 혼란 속에 왕은 계속 피난을 다녔고, 이러한 소식은 백성을 안심시키지 못했다. 분노한 백성을 달래는 몫을 한 사람은 선조가 아니라 광해군이었다. 광해군은 험한 산길을 누비며 혼란 중의 백성을 달랬다. 선조가 썼던 편지 중 “내가 살아서는 망한 나라의 왕이 되었고, 죽어서는 다른 나라 땅의 귀신이 되겠구나.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헤어져 있으니, 다시 볼날이 없을 듯 하다, 바라건대, 세자는 옛 강토를 다시 회복하여 위로는 조상의 영홍을 위로하라”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후궁의 아들로 적장자를 늘 기대했던 아버지의 차갑고 냉담한 시선을 받았던 광해군은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세자로 전장을 누볐고 왕과 조정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백성에게 전하자 백성의 사기는 올라갔다. 세자의 위상이 높아졌지만, 피난을 다닌 아비 선조는 이 소식이 달갑지 않았다. 마치, 사울왕이 다윗왕을 질투했던 것과 흡사하다. 심지어 아비와 아들의 관계였는데도 말이다. 이후, 도망친 선조에게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선위를 결심하여 광해군을 불편하게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왕이 버젓이 살아 있는데 왕위를 물려주라는 '선위'라니 광해군은 '아니, 아니, 아니되옵니다' 라며 선조가 마음을 비뚤게 먹고 심술을 부릴 때마다 광해군은 명을 거두어 달라 엎드려 빌었다.
의인왕후는 광해군을 키워준 친어미가 아니다. 광해군이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 죽은 후궁 친어머니 공빈 김씨의 자리를 대신해 광해군을 따뜻히 길러주었지만 그 역시도 세상을 떠났다. 공빈 김씨에게는 임해군과 광해군 두 아들이 있었지만 적장자도 첫째도 아닌, 둘째 광해군이 난중에 세자에 책봉이 되었고, 후궁 공빈 김씨, 의인왕후를 떠나 보낸 선조는 새로운 중전인 인목왕후를 맞이했다. 이 둘 사이에 적장자 영창대군이 태어났다. 후궁의 아들로서 왕위에 오른 아비 선조가 얼마나 적장자의 명분에 시달렸는지 광해군은 잘 알고 있었고, 영창대군의 탄생으로 광해군과 선조는 새로운 위기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광해군이 후궁의 아들이었고, 그래서 선조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하필이면 난중의 위기에서 나라를 잘 보살핀 광해군은 선조의 눈에 가시가 되었다. 이런 중에 선위의 문제가 날마다 신하들 입에 오르내렸고, 적장자 영창대군의 탄생으로 안 그래도 바람 잘 날 없던 아비와 아들 사이에는 큰 균열이 생겼다. 광해군은 철저히 혼자였다. 광해군의 스트레스는 극도에 달했다. 그러나 선조가 생각보다 빨리 세상을 떠나면서 광해군은 결국, 왕이 되었다. 광해군은 왕이 되어 난중에서 돌아보았던 백성을 잘 보살피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영창대군의 일이 결국 역모로 일어나면서 영창대군, 인목대비 모두 죽이게 되었고, 거기에 후금이라는 (후에 청나라가 됨) 새로운 나라가 세워져 명을 위협하면서 외교 문제도 심각하게 발생했다. 명은 후금의 위협에 조선이 도울 것을 요청했지만 전쟁의 참상을 아는 광해군은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중립적 외교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신하들이 명을 저버리면 안된다는 거센 반발과 함께 인조반정, 즉 광해군의 조카 인조가 반정을 꾀하고 광해군은 15년만에 왕위에서 쫓겨났다.
소현세자는 인조반정의 주인공 인조의 아들이다. 인조는 친명배금을 명분으로 광해군을 왕위에서 내렸다. 여담이지만 명나라를 스승 혹은 아비의 나라라 받들어 섬기던 유학의 나라를 언제나 벗어날 수 있을지 21세기 의 4분의 1이 지난 지금도 궁금하다. 어찌되었건, 후금은 광해군 이후에 급속도로 성장했고, 명을 자주 위협했다. 오랑캐라고 멸시하는 후금의 위협에 명은 도우라는 명을 재촉했다. 이에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인조는 정묘호란, 병자호란이라는 청의 조선 침략에 혹독한 겨울을 맞이해야 했다.
남한산성에서 인조는 청 황제 홍타이지 앞에 무릎을 꿇은 뒤, 또 청을 섬기게 되었다.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고 세 번 절을 한 왕과 신하 대신, 그 아들 소현세자와 수만의 백성들이 청으로 끌려갔다. 백성들은 노예로 팔렸고, 소현세자는 망한 나라의 아들로 온갖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와중에 소현세자는 인조의 세자로, 명에게 조선의 세자로, 그리고 청에게 조선의 세자로 세번이나 세자로 책봉받은 정통성이 증명된 아들이었다.
소현세자는 낯선 청나라에서 8년을 살았다. 처음에는 열악한 환경과 홀대에 힘이 들었고, 심지어 청나라 왕의 연회에 끌려나가 꼭두각시가 되었던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청의 전쟁터에 끌려 나가기도 하고 목숨을 잃을 뻔 한 적도 여러차례였다. 그러나 이러한 반복적인 힘든 살이도 인이 베기는 법. 소현세자는 부지런히 움직여 허름한 집을 고치고, 조선 포로들을 데려다가 농사를 지으며, 청나라 문물을 배우기에도 열심을 다했다. 자그마치 8년 후, 청 황제의 허락으로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아비 인조는 마중조차 나오지 않았다. 청의 문물을 배우는데 열심이라는 소식을 들은 인조는 화가 단단히 나있었다. 적국과 통하고 적국의 문물을 배우고 들여오는 아들이 반가울리 없었고, 둘째 봉림대군의 귀국도 허락하지 않은 상태라 청이 소현세자를 앞세워 자신을 왕위에서 내리려는 의도가 아니었나 의심을 했다. 소현세자가 조선과 아버지를 얼마나 그리워하며 인내로 그 모진 세월을 감당하며 견뎠을지 모르겠다. 얼마나 복받치는 감정으로 고향 땅을 밟았을지 눈물이 날 지경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매몰찼다.
소현세자는 귀국 한 지 1년이 조금 넘어 세상을 떠났다. 당시 세자의 죽음에 대해 인조실록은 이렇게 기록했다.
‘세자가 타국에서 온갖 고생을 겪고 본국에 돌아온 지 겨우 수개월만에 병이 들었는데, 의관들이 함부로 침을 놓고 약을 쓰다가 끝내 죽었다.’
난 두 왕에 관한 기록을 읽으면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에베소서 6장 4절의 말씀이 떠올랐다.
두 아비 선조와 인조는 왕위를 두고 자녀를 시기 질투했다. 그리고 죽음으로 몰아세웠다. 자녀들은 늘 부모의 따뜻한 눈빛을 기다리고, 부모의 따뜻한 손길을 기다린다. 이 마음은 어느 뒷골목 허름한 집 담 너머의 자식이나 화려한 대궐 같은 궁궐의 자식에게나 모두 다 같은 마음일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 제일 가련한 사랑은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하면서도 부모를 사랑하는 자식들의 부모를 향한 사랑이다. 뭐든 똑같이 나누어주어도 모자라다 여기는 아이에게는 더 주면 될 것이고 품어줘도 더 안아달라고 조르면 더 안아주면 될 것이다.
인류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상하관계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벗어날 수 없는 지독한 복종의 수레바퀴에 갇혀 사는데 우리의 유일한 안식처가 가정이고 부모의 품이며 하나님 아버지의 품이다. 오직 그 뿐인
피난처가 없는 사람은 정말이지 외롭고 괴롭고 슬프고 고독한 삶을 홀로 감당해야 한다.
전장을 아비대신 누비던 아비의 사랑과 인정에 목 말랐던 광해군, 적국에 포로로 끌려갔어도 굳은 의지와 지혜로 서러움을 이겨내 아버지께 돌아가고 싶었던 소현세자. 그리고 위에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타고난 호랑이 기질로 영조의 인정을 받지 못해 죽음을 맞이한 사도세자까지 정말로 가슴 아픈 자식들의 죽음에 책장이 넘겨지지 않았다. 그런데 광해군의 아비였던 선조도 사도세자의 아비였던 영조도 딱한 인물이다. 선조는 후궁의 아들로 태어나 늘 적장자로 왕위를 받지 못해 신하들에게 명분으로 시달렸고, 영조는 장희빈과 인현왕후 사이에서 피바람이 나던 숙종시대 셋째부인 숙빈최씨의 아들로 태어나 천한신분인 어미의 그늘을 벗어나려고 그 똑똑하기로 콧대높은 신하들을 꺾기위해 공부에 매진할 수 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사도세자가 공부에 뛰어나길 바랐던 것도 소현세자가 아닌 적장자가 왕이 되어 평탄하길 바랐던 것도 다 상처가 깊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자녀는 부모의 기대의 산물이 아니다.
부모는 자녀의 주인이 아니다.
다시 또 다시 말하지만, 자녀는 주께서 맡기신 선물이며 부모는 책임을 충성스럽게 다 해야하는 종일 뿐이다.
자녀가 힘겨워 하는 게 보인다면 그건 아마도 부모의 기대와 욕심에 못 미치는 자신을 매일 채찍질하는 하루를 견뎌야 하기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