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소년 첫 목격담
대한제국과 함께 태어난 아버지
제 친정아버지는 1897년생이십니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세운 해에 태어났다고 말하곤 하셨어요.
젊어서는 돈 버는 재미에 팔려 바쁘게 지내시다 결혼을 참 늦게 하셨다지요. 그러다 보니 아버지가 큰딸인 저를 낳을 때 나이가 무려 40대였어요. 처녀건 총각이건 20대에 접어들기 무섭게 혼인을 하고 출산을 하던 그 시절의 풍속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늦은 거죠.
어릴 때 학교에 가면 다른 친구들 엄마, 아빠는 다들 젊은데, 내 엄마, 아빠는 할머니, 할아버지 같아서 친구들 앞에서 왠지 늘 창피해하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가 자란 동네는 ‘충청남도 공주군 장기면 당암리’라는 곳입니다. 지금은 세종시 아파트단지가 빼곡히 들어선 곳이지만, 그때는 말 그대로 하늘만 빼꼼히 보이는 산골이었답니다.
그 산골에서 도시 구경 한번 못하고 크셨대요. 당암리 근처에 그나마 큰 곳이 공주읍과 조치원읍이었는데, 10대 중반을 넘어서야 읍내 구경을 시작했다 하십니다.
제가 국민학생이던 어느 날, 아버지가 동네 친구분들에게 하는 얘기를 옆에서 듣게 됐어요.
황소보다 큰 괴상한 놈
아버지가 17살이던 해에 조치원읍 장터에 혼자 심부름을 갔었대요. 장터에서 아버지는 놀라운 구경을 했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호들갑을 떨며 그 얘기를 할아버지한테 했답니다.
"아버지, 지가 오늘 읍내에서 괴상한 놈을 보고 왔슈."
뭘 봤길래 이리 난리냐고 할아버지가 되물었더니.
"아 글씨, 그게 뭔 놈인지 그걸 지도 모르겄어서 그류. 황소보다 더 큰 놈인데, 대가리도 꽁지도 없는 이상한 놈이 서 있길래 구경을 하려니께, 갑자기 어찌나 빠르게 도망을 가버리는지 찬찬히 살펴볼 새도 없었슈. 도대체 그놈이 뭔 놈이래유?"
할아버지가 "그런 게 어딨단 말이냐, 이놈아!" 하시는데, 옆에 있던 큰아버지가 웃으면서 "아마 저놈이 도라꾸를 보고 온 것 같네요." 하더랍니다.
아버지는 생전 처음 자동차, 그것도 트럭을 본 거고, 할아버지는 그때까지도 자동차 구경을 못하셨지만, 큰아버지만 한번 구경해본 경험이 있으셨던 거죠.
기차에게 절을 하며 소원을 빌었던 사람들
그 뒤로도 아버지는 종종 사람들 앞에서 처음으로 자동차 구경한 그 이야기를 하곤 하셨는데, 이상하게 저는 그것도 창피했어요.
저 어릴 때도 자동차는 구경거리이긴 했지만 그렇게 보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 이야기를 굳이 남들에게 하면서 왜 저렇게 촌티를 내시는 걸까 했던 거죠.
나이가 드시면서 병환으로 고생 중에도 늘 유쾌했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생전 아버지 모습은 가슴 속에 묻고 지내던 제 중년의 어느 날. 아버지의 그 경험담을 다시 떠올리게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라디오를 켜놓은 채 바느질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코미디언 배삼룡 씨가 만담을 시작하네요.
우리나라에 기차가 처음 생길 때, 사람들이 "궐련 담배 한 개피 피우다 보면 서울에서 인천에 도착한다네." 하면, 그걸 듣는 사람들은 또 그 말을 받아 "예끼, 이 사람아, 그런 게 어디 있단 말이오. 있다면 귀신이지!" 했어요.
그런 입소문 속에 기차 개통식이 드디어 열렸는데, 역 앞에 사람들이 개미떼같이 구경을 하러 모였죠.
우렁찬 칙칙폭폭 소리와 함께 거대한 기차가 역을 출발하자, 그 엄청난 장면에 놀란 사람들이 입을 모아 "저거 진짜 귀신이다!", "괴물이다!" 하면서, 떠나가는 기차를 향해 절을 하며 저마다 소원을 빌었다는 거 아시나요?
사람들이 자동차를 '쇠망아지’, ‘쇠괴물’이라고 부르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푸하하하~
배삼룡보다 재미있던 아버지의 만담 솜씨
한참을 웃으면서 배삼룡 씨의 만담을 듣다 보니, 새삼 아버지의 그 자동차 목격담이 저절로 떠오르는 거예요.
기차를 처음 본 사람들도 저랬다는데, 자동차, 그것도 트럭을 처음 본 아버지가 ‘대가리도 꽁지도 없으면서 황소보다 더 큰 놈이 빠르게 도망갔다’고 한 아버지의 놀라운 느낌이 그제서야 제게도 전해지는 겁니다.
더구나 세월을 짚어보니, 아버지가 처음 트럭을 봤을 때가 우리나라에 자동차가 100대도 되지 않았을 때라고 하더군요. 그러니 그 시골 촌 동네에서 굉장한 구경을 한 게 맞는 거죠.
내가 창피해할 아버지의 촌스러운 이야기가 조금도 아니고, 누구보다 빨리 도라꾸를 구경한 아버지의 신기한 경험담이 맞다는 걸 그제서야 알게 됐답니다.
배삼룡 씨의 만담보다 더 유쾌하게 그 이야기를 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새삼 그리워 지더군요.
'아부지, 나 서울에서 이사 참 많이 다녔어. 그때마다 도라꾸 타고."
'그려~ 욕봤구나, 우리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