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길고 크고 아름다운 두 다리
고향의 자랑, 금강철교
제 고향 공주 하면 떠오르는 건 금강과 금강철교입니다.
공주에는 마곡사와 갑사, 공주산성과 무령왕릉 등 이쁘고 유명한 곳들이 많아요.
하지만 제가 살던 장기면에서 공주 읍내로 들어서려면, 처음 만나게 되는 도도하게 흐르는 금강과, 그 위에 우아하게 서 있는 금강철교가 공주를 상징하는 아름다운 풍경이었죠.
저 어릴 적 국민학교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공주 금강의 금강철교와 서울 한강의 한강철교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양대 철교라고 하셨어요. 한강을 시작으로 한반도 끝까지 우리나라에 있는 다리 중 가장 길고 크고 아름다운 다리라고도 하셨구요.
어린 제 눈에도 교각 위에 얹혀 있는 구름 모양의 철골 아치가 얼마나 웅장하고 이쁘던지, '내가 대단한 동네에 살고 있구나' 하며 우쭐해지곤 했답니다.
해마다 추석 명절이 되면, 당시 공주군 내의 읍과 면을 대표하는 풍물패들이, 공주산성에 있는 산성공원에 모두 모여 풍물대회를 열었어요.
대회날이면, 공주군 구석구석 작은 마을의 풍물패들까지 모두 모여, 저마다의 풍물 소리, 어린 아이들의 웃음 소리, 어르신들의 흥겨운 노래 소리까지 한데 섞으며, 공주읍을 온통 떠들썩하게 했답니다.
저는 이렇게 대단한 잔치는 우리 고향 공주에만 있는 건 줄 알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나라 곳곳마다 펼쳐지는 향토축제 중 하나였던 건데 말입니다.
폭파된 두 철교의 아름다움
그러다가 6.25 전쟁이 터지고, 어린 제게 큰 자부심이었던 금강철교가 그만 폭파되고 말았어요.
한강철교도 이때 폭파됐다죠. 북한군이 한강 아래로 내려오는 걸 막으려고 한강철교를 폭파했고, 이어서 금강 아래로 내려오는 것도 막으려고 금강철교마저 폭파했죠.
우리 마을 사람들은 한강철교가 폭파되던 날, 이 소식을 듣자마자 동네 깊은 산 속인 '구리실'로 1차 피란을 갔고, 금강철교가 폭파되기 불과 몇 시간 전 미리 언질을 받고는, 거의 마지막으로 금강철교를 건너 더 남쪽으로 2차 피란을 갔어요.
우리 집만은 저 때문에, 달랑 세 가구가 있던 우리 동네 가장 깊은 오지의 이름도 없는 산골 마을로 2차 피란을 가게 됐답니다.
「6.25 그 전쟁의 회상」바로가기
우리나라 양대 철교가 졸지에 모두 없어진 거예요.
공주의 큰 잔치였던 풍물대회도 없어졌어요. 모일 수가 없으니까요.
공주 읍내의 오일장은 시골 사람들이 생활필수품을 사고파는 건 물론이고,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정말 중요한 생활 나들이 행사였는데, 이 오일장도, 없어진 금강철교 때문에 엄청 힘들어졌어요.
그래도 꼭 모여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 오일장을 풍물대회처럼 아주 없앨 수는 없었지만, 그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나룻배들이 금강 양쪽으로 장사진을 이뤘죠.
정말 고생했던 건 전쟁 통에도 매일 등하교를 해야 하는 어린 중, 고등학생들이었습니다. 공주군에서 국민학교는 각자 살고 있는 면에서 다닐 수 있었지만, 중, 고등학교는 공주읍에 있었기에 그 나룻배 통학길이 중, 고등학생들에게는 정말 고행길이었답니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뱃사공들의 불친절한 텃세도 정말 심했거든요.
몇 년 지나지 않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금강철교가 거짓말처럼 복원됐어요. 지금 따져보니 불과 2년 만이었는데, 그때 어른들의 한숨 소리가 어찌나 깊고 길었던지, 당시 기분으로는 한 10년 만인 것 같았습니다.
학생들의 등하교 길은 다시 편해졌고, 공주 오일장도 다시 사람들로 북적였죠. 사라졌던 추석 풍물대회도 마침내 다시 열렸습니다. 하루 종일 떠들썩한 공산성 풍물대회의 흥겨운 모습을 보니, '이제야 공주가 다시 사람 사는 세상이 됐구나!' 새삼 실감이 나더군요.
어린 제게 큰 자부심이었던 금강철교의 아름다운 구름 아치를 다시 볼 수 있게 된 게 당연히 제일 자랑스러웠구요.
늙어도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재
그때로부터 70여 년이 넘는 세월을 훌쩍 보냈는데, 이제는 제가 '어르신'이 되어 서울의 노인문화센터에서 풍물과 노래, 춤을 배우고, 각종 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어릴 때 겪었던 내 고향 공주의 추석 풍물대회 생각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금강철교를 건너 공주읍 공산성에서 펼쳐졌던 아련한 기억 말이죠.
공산성 풍물대회는 흥겨웠지만 못내 아쉬웠던 기억이 있거든요. 다른 면동네 풍물패들은 잘도 입상을 해서 쌀가마도 가져가고 황소도 몰고가고 하는데, 제 동네 장기면 풍물패는 한 번도 입상하는 걸 못 봤거든요.
사실 속으로는 ‘에이, 모자란 어른들’ 그렇게 원망하면서 무척 속상해하곤 했답니다.
그때 어른들 나이를 훌쩍 넘은 제가 서울의 각종 풍물대회에 입상하면서 그 속상함을 뒤늦게 달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어요.
나야 전문 강사들한테 배웠지만, 그때 어른들은 누구한테 배우지도 않았으면서 그렇게나 두들겨 댔단 말이죠. 어쩌면 그게 정말 삶 속의 풍물놀이고 진짜 흥겨움 아니었을까 싶은 마음이 드는 겁니다.
공주에서 결혼을 하고, 몇 년 후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 마음먹고 찾아갔던 곳이 한강철교였어요. 우리나라 양대 철교가 금강철교와 한강철교라 했던 국민학교 선생님 말씀을 떠올리며, 과연 어떤지 제 눈으로 직접 비교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때는 ‘역시 우리 금강철교가 훨씬 더 멋있다~’ 했는데, 더 나이를 먹고 어느 날 금강철교를 다시 꼼꼼히 보고는 ‘어라, 그 웅장했던 철교가 왜 이리 짧아졌지?’ 했어요. 제가 어른으로 크는 만큼, 아마도 두 철교는 모두 늙어갔나 봅니다.
그래도 역시 내 고향 금강철교가 더 멋있어요. 2천년대가 되면서 금강철교가 문화재로 지정받았다는데, 한강철교가 문화재 됐다는 소리는 아직 못 들어봤거든요.
제 고향 금강철교 자랑으로도 모자라 제 풍물솜씨 입상 자랑까지... 제가 지금 낯 뜨겁게 왜 이러죠?
나잇값 못하는 늙은이의 혼잣소리로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