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워요, 할아버지"

너무 늦어버린 인사

by 꼭두

"고마워요, 할아버지"

너무 늦어버린 인사


볼거리 먹거리 풍성한 마을 잔칫날


국민학교 시절, 해마다 가을이 되면 학교 운동회가 열렸습니다.


가을 운동회는 그저 학교의 연례행사가 아니었어요. 마을의 큰 잔치였습니다. 하루하루를 똑같이 보내던 시골 사람들에게는 아주 특별하고 이색적인 마을의 놀이판이었고요.


끼니가 궁색하던 봄, 여름을 땀 흘려 넘기고 나서, 오곡백과를 풍성하게 수확하여 일 년 중 가장 먹거리가 풍부해진 가을날의 한복판.


산골 외딴집 구석구석마다 갓 수확한 과일이며 떡 등을 아낌없이 장만해서, 제가 살던 면 소재지의 국민학교 운동장에 모든 학생 집안의 온 가족이 모이는, 마을의 큰 축제날이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학교에 들어서는 길목부터 온갖 먹거리를 펼쳐놓은 장사꾼들의 행렬이 아주 길게 이어지고요. 운동장 안 담장을 둘러싸고는 우거짓국에 막걸리를 차려놓은 좌판마다 할아버지들이 삼삼오오 모여 일찌감치부터 작은 술판들을 벌인답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괜히 기분이 벅차오르는 풍성한 볼거리였죠.


제 집 바로 뒤가, 우리 공주군 장기면의 ‘장기국민학교’였어요.


어린 저는, 가을 운동회 전날부터 우리 집에 모인 친척들이 먹거리를 장만하기 시작할 때부터 들뜨기 시작하다가, 드디어 날이 밝으면 그 요란한 가을 운동회 풍경들을 보며, 가족들 손을 잡고 신이 나서 학교 운동장에 들어섰죠.


릴레이, 손에 손잡고


가을 운동회의 하이라이트는 5, 6학년만 참여할 수 있는 ‘손님과 손잡고 릴레이’였어요.


운동장 한 바퀴가 200미터인데, 100미터를 먼저 혼자 달리면 접힌 쪽지들이 나란히 놓여있는 탁자를 만나게 돼요. 그 쪽지를 펼쳐보면 함께 손잡고 뛰어야 하는 손님이 적혀있고, 그 손님을 찾아 함께 손잡고 나머지 100미터를 뛰어야 합니다.


모두의 관심을 끄는 가을 운동회의 가장 인기 순서였죠.


저도 손꼽아 기다리던 5학년이 됐고, 마침내 ‘손잡고 릴레이’ 차례가 됐습니다. 100미터를 정말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려 나갔고, 누구보다 빨리 쪽지를 집었습니다.


그런데 맙소사, 쪽지에 적힌 이름은 제가 그토록 바라던 ‘선생님’이 아니고 ‘아버지’라고 적혀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당시 아버지는 오랜 병환으로 집에서 누워 지내시던 시절이었거든요.


저는 아찔한 절망감에 “아이고, 아버지~” 하며 원망하듯 소리만 지르며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다들 안타까운 표정으로 저를 쳐다본다 싶었는데, 잠시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마도 제가 안쓰러워 보이셨던 거겠죠.


처음 뵙는 어떤 할아버지 한 분이 나와 제 손을 잡는 겁니다.


5전 6기, 꼴찌에서 1등으로


놀라서 울음을 멈추고 멀뚱거리는 저를 보며, 할아버지는 얼굴 한가득 미소를 머금고는 “아가, 어서 뛰자” 하시네요.


얼떨결에 할아버지 손을 잡고 다시 뛰기 시작하는데, 순간 바로 뒤에서 따라오던 학생과 청년 팀이 할아버지 어깨를 치며 우리를 앞질러 나갑니다.


안 그래도 힘에 부쳐하시는 것 같던 할아버지가 그만 쓰러지셨고, 저도 잡고 있던 손을 놓치고 말았죠.


모든 팀들이 목적지에 도착하는 걸 주저앉아 지켜보기만 하다가, 저는 다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이래저래 속상한 마음만 한가득이었던 거죠. 한참을 눈도 안 뜨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결국 가족들이 저를 데리러 왔고, 그제서야 주변을 둘러보는데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더라고요.


이듬해에 결국 소원 성취를 했답니다.


6학년 가을 운동회 날 잡은 쪽지에는 ‘선생님’이라 적혀 있었고, 저는 제가 제일 좋아하던 선생님을 향해, “선생님~” 하며 신나게 소리쳐 불렀습니다. 그 선생님 손을 잡고 꿈길 같은 100미터를 마저 달려 1등으로 도착했어요.


온 세상이 제 것 같더군요.


"고마워요, 할아버지"


그 선생님은 당시 우리 국민학교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던 남자 선생님이셨어요. 6.25 전쟁 통에 서울에서 피난 오신 ‘김선희 선생님’.


선생님이 지금까지 저를 기억하고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그날의 즐거웠던 추억과 함께 한 번쯤은 꼭 다시 뵙고 싶은 분이십니다.


“김선희 선생님,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시죠?”


그런데요.


고향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그 6학년 가을 운동회 날, 함께 즐거웠던 선생님과의 추억만 아련했었는데,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지금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5학년 가을 운동회 날의 그 할아버지 생각이 자꾸 떠오릅니다.


하염없이 주저앉아 울고 있는 어린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신 할아버지의 그 마음이 헤아려지고, 그러다가 그만 힘에 부쳐 쓰러지신 후, 또 기약없이 주저앉아 울고만 있는 저를 두고 혼자 가실 수밖에 없으셨던 할아버지의 안타까움이 새록새록 느껴지는 겁니다.


그때 제가 할아버지 손을 놓치지 말았어야 한다. 그저 내 속상함만 가득해서 울기만 하다 인사도 없이 할아버지를 혼자 보내드리지 말았어야 한다. 돌아보면 볼수록 이런 송구함만이 가득합니다.


제 아련한 실수를 어린 시절의 철없음으로만 돌리기에는, 너무 늦은 후회를 곱씹게 되곤 하는 거죠.


먼저 그 할아버지께 이제서야, 너무 많이 늦어버린 인사를 드립니다.


“할아버지, 그날 너무 고마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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