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다리가 아픈가봐"
가을 벼 베기, 그 아픔의 흔적
1950년대, 시골 마을의 어린 학생이었던 저.
오랜 시간이 저를 지나가며 쌓이더니, 어느덧 2025년이 막 된 지금은 저도 어른을 넘어 노년이 됐네요. 그때도 지금도 학생이긴 합니다. 50년대에는 국민학교, 지금은 노인대학.
문득 오늘은, 지금까지도 제 몸에 또렷하게 남아 있는 어린 날의 아픔과, 하지만 이어서 그 아픔을 달래주던 위로와 기쁨의 기억을 이야기 드리고 싶네요.
6.25 전쟁통 속에 국민학교를 다녔습니다. 전쟁학교 혹은 피란학교라고들 불렀죠.
우리 학교는 논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 논의 농사일은 학생들이 했습니다. 모내기 무렵이 되면 모도 심고, 벼가 다 익으면 벼 베기도 우리들이 했죠.
지금 와서 새삼 '왜 그랬을까?'를 애써 좋게 헤아려보면 ‘농사체험’ 쯤 되려나요? 하지만 그때는, 우리 마을 집집마다 이미 다 농사를 짓고 있는데, 굳이 왜 학교에서까지 농사를 짓게 했을까 싶어요. 게다가 그 어린 학생들에게.
요즘 도시에 살면서, '농사'라는 걸 언덕 위 나무에 저절로 열린 과일이나 따고, 들판에 알아서 잘 자란 '벼나무'에서 '쌀열매' 알을 기계로 털어내면 되는 걸로 아는, 어린 아이들에게라면 모를까. 농사체험은 개뿔... 그냥 학생들을 머슴 삼아 일을 시킨 거잖아요.
요즘 같으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일 겁니다. 당장 부모들이 들고 일어나겠죠.
평생 남은 상처, 왼 손가락 중지 한 마디
그나마 저학년은 하지 않고요. 4, 5, 6학년 상급생들에게 시켰습니다. 저도 4학년이 되어 모내기를 하게 됐어요.
한참을 모를 심다가 발목이 너무 가려워 긁으려고 손을 댔는데, 느낌이 이상해서 보니 시커먼 거머리가 발목에 착 달라붙어 제 살을 뜯어 먹고 있는 거예요. 너무 놀랐죠. 비명을 지르면서 울었습니다. 선생님이 바로 달려와서 떼어 주셨지만, 거머리가 붙어 있던 자리에서는 한참 동안을 멈추지 않고 피가 흘러나오더군요.
그 끔찍했던 기억 때문에 이듬해 모 심는 날에는 핑계를 만들어 아예 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해인 6학년이 되어서도 결석을 했죠. 그렇게 모내기는 피해 갔는데, 정작 사고는 벼 베기에서 터지고 말았죠.
다 함께 벼를 베고 거두어서 몇 군데 모아요. 여학생들이 벼 한 무더기씩을 남학생에게 건네주면, 남학생들은 탈곡기를 발로 밟으며 그 벼를 털죠. 남학생 둘이 한 조가 되어 두 발로 힘을 막 주며 탈곡기를 밟는데 참 재밌어 보이더라구요.
우렁우렁 소리를 내며 리듬에 맞춰 신나게 돌아가는 탈곡기가 제 특유의 호기심을 자극한 거죠. 그 호기심이 불행의 씨앗이 될 줄도 모르고.
옆에서 한참 동안 기회를 엿보던 저는, 잠시 남학생들이 쉬는 틈을 타서 탈곡기에 달려들었답니다. 그러다가 그만 탈곡기 톱니바퀴에 제 손이 끼어들어 가고 말았어요.
멈출 틈도 없이 손마디가 말려 들어갔고 왼손 중지 첫마디가 제법 많이 갈려 나가는 사고가 났어요. 순식간에 난리가 났고, 즉시 병원에 가서 치료를 했지만, 그 손마디를 원래 모습으로 다 회복할 수는 없었습니다.
속이 상하고 화가 치민 우리 아버지는 학교에 달려가 정말 크게 항의를 하며 싸우셨고, 그 일이 있고 난 후부터 학교에서는 더 이상 학생들에게 농사일을 시키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 늘 시름 맞게 바라보며 지내야 했던 제 왼손 중지 첫마디. 지금도 남 앞에서는 손을 제대로 내보이지 못하는 혼자만의 평생 콤플렉스가 되고 말았다지요.
반지하고는 평생 인연을 맺지 못하는 제 사연을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실은 이 상처와도 관련이 깊은 일종의 트라우마 같은 거였어요. 반지 낀 왼손을 남 앞에 자연스럽게 보일 수 없었으니까요. 평생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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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알려준 동시, 상처의 치료
전쟁통 속의 어린 학생 시절을 재미와 행복으로만 기억하는 제게, 거의 유일하게 남은 벼 베기의 아픔과 상처였지만, 역시 그 아픔을 위로하고 치료해 주는 것도 학교였어요.
시름 맞게 그 왼손 마디의 상처를 감추고 살던 겨울이 지나고 이듬해 봄이 왔어요.
국어책에, 봄에 대한 동시가 있었어요. 미리 받은 교과서에서 그 시를 읽었는데, 그저 그 시가 너무 좋아서 몇 번을 읽고 또 읽었는지 모릅니다. 선생님도 그랬나 봐요. 국어 수업 시간이 됐는데 선생님께서 그 시를 읽고 독후감을 써서 내라 하시더군요.
신났죠. 저는 이미 달달 외우고 있는 동시였으니까요. 그 시가 하도 마음에 남아서 틈날 때마다 외워 부르다 보니 저 대목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직도 잘 외우고 있는 건지, 앞뒤로 다른 시구가 더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제목이 떠오르지 않아 아들에게 한번 찾아보라고 시켰거든요. 그런데 한참을 끙끙대던 아들이 그러네요.
"왜 이렇게 훌륭한 시가 제목도 내용도 남아있지 않는 거지? 아무리 전쟁 중의 임시 교과서였다지만 엄연히 교과서에 실렸다던 동시가 말야. 지금은 어디에서도 검색이 안 되네."
또 한 번의 새봄을 기다려 봐도 될까요?
제가 써서 냈던 독후감도 기억이 납니다. 단어들이 정확한지 자신할 순 없지만, 제가 가장 좋아했던 시의 대목을 그대로 적은 뒤, 다시 그 시를 흉내 내어 제 느낌을 대략 이렇게 썼어요.
선생님이 정말 여러 번 칭찬해 주시더라구요. 제 발목에서 거머리를 떼어주고, 제 상처난 손을 꼭 쥐고 병원에 데려다주신 그 선생님. 아마도 같은 기억, 같은 느낌이 드셨던 걸까요? 교실의 모든 친구가 탄성을 보내며, 크게 칭찬받는 저를 부러워하던 기억이 새롭네요. 기뻤어요.
그해 가을 벼 베기는 제 몸에 평생 상처를 남겼지만, 이듬해 봄에 그 상처를 위로해 준 그 동시는 지금도 제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답니다.
2025년 봄을 앞두고 확연하게 노인이 된 저는 요즘 머리가 또렷할 때보다 흐릿할 때가 더 많답니다. 물론 자식들이 걱정스런 소리를 제게 하면, 그때마다 저는 펄쩍 뛰며 큰소리치곤 하죠.
"니들 어미 치매 걸릴 때까지만 살면 니들은 장수무강하는 거야."
하지만 속으로는 혹시나 하는 불안한 마음 한켠으로 왠지 아들에게 미안합니다. 몸은 너무 튼튼하고 잘 생겼지만, 마음이 아픈 어린 손자를 청년으로 혼자 키워낼 때까지, 참 많이도 고생한 아들이거든요. 지금도 셋이 같이 한 지붕 아래 살고 있어요.
우리 집에 큰 위로와 기쁨을 안겨줄 새봄.
제게 또 찾아오려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