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빵'과 '튀밥'

공주 오일장의 기억

by 꼭두

'건빵과 튀밥'

공주 오일장의 기억


창 맞닿은 우체국의 전화교환원


어린 시절 제가 살던 집은 충청도 공주읍에서 이십 리쯤 떨어진 장기면이라는 곳입니다.


바로 옆에 전화국 겸 우체국의 사무실과 사택이 있었죠. 우리 집 안채와 전화국의 사무실 창이 맞닿아 있었고, 안채에 앉아 있으면 그 창 앞에 앉아 있는 전화교환원과 눈이 마주치는 거리입니다.


전화교환원이 여기저기로 부지런히 전화를 연결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컸어요. 조금도 충청도스럽지 않은 교환원의 신들린 듯 빠른 목소리가, 어린 제게는 마치 주문을 외우는 것 같았답니다. 잘 짜여진 모노드라마 공연을 보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요? 쉼 없는 손놀림을 함께 구경하는 건 덤이고요.


전보도 전화로 받더군요. 어쩌다 우리 집에 전보가 도착하면 창을 열고 제게 소리치곤 했습니다.


“건순아, 전보 왔다. 어서 찾아가거라.”


그 시절 사람들에게 오일장은 무척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장기면과 공주읍, 두 곳에 철공소 겸 철물점을 운영하고 계시던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는 더욱 중요한 날이었어요. 우리 집이 있는 장기면에서 오일장이 열리고 나면, 바로 다음 날은 훨씬 규모가 큰 공주 읍내장이 열리는 날이었죠.


평소에도 막내동생은 늘 제가 업어 키우는 담당이지만, 오일장 열리는 날이 진짜배기입니다. 공주 읍내장이 열리는 날이면, 새벽같이 부모님은 읍내장으로 행차하시고, 해가 지고 나서야 집에 돌아오십니다. 돌아오실 그때까지, 하루 종일 막내동생을 보살피는 일은 온전히 제가 혼자 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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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국 사모님은 고자질쟁이


당시 세 살박이였던 아기 동생은 늘 우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전화국 창문이 열리면서 그 전화교환원이 우리 집에 하소연을 하곤 했어요. 아기 울음소리에 도저히 전화 연결을 할 수 없으니 제발 아기 좀 달래달라고 말이죠.


문제는, 공주 읍내장이 열리는 날이면 그게 더 심해진다는 거죠. 아이를 달래는 사람이 저 혼자뿐이니까요. 게다가 원래 엄마가 있으면 안 울고, 제가 볼 때면 우는 이상한 아이였습니다.


게다가, 저는 이미 제 동생 우는 소리에 익숙해져 있는 터라, 동생이 울거나 말거나 우는 아이를 업은 채, 동무들과 공기놀이도 하고 고무줄놀이도 하면서 장날을 보냈습니다.


공주 읍내장이 열린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그 전화국 사택에 살고 있는 국장 사모님이 우리 엄마를 찾아와 고자질인지 하소연인지를 합니다. 제가 하루 종일 아이를 울리면서 동무들과 놀기만 해서, 전화국 직원들이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없다고요. 그때마다 저는 엄마한테 죽도록 혼나야 했죠.


하지만 제게는 그저 익숙한 일상입니다. 5일마다 반복되는 일이니까요.


그 시절, 전화국은 물론이고 우리 동네에서 사람들이 하던 말이 생각납니다.


“우체국 옆집 아기 종일 자지러져 우는 날은 공주 읍내장 서는 날”


오일장의 유산, '건빵'과 '튀밥'


제 위로 오빠가 둘이에요. 동생이 제 등에서 울며 크던 무렵은 저를 포함해서 셋 다 국민학생이던 시절입니다.


공주읍 오일장에 다녀오신 저녁이면, 어머니는 늦은 저녁을 준비하시고, 아버지는 오일장에서 벌어오신 돈을 여기저기서 꺼내 쏟아놓으며 우리에게 그러시죠.


"이 돈 좀 계산해 놓거라."


아버지가 씻고 식사하시는 동안, 오빠들은 돈을 정리하면서 자기 호주머니에 몇 푼씩 슬쩍 챙겨넣곤 했답니다. 들통나면 경을 칠 일이기에, 슬쩍해본들 그야말로 표 안 나는 푼돈 몇 잎이지만요. 그 돈으로 사 먹는 군것질은 거의 '건빵'이었어요.


그 시절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최고로 인기 있었던 군용 건빵. 저한테는 엄마한테 이르지 말라며 감질날 정도로 조금씩만 나눠주곤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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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 아니에요. 진짜는 그다음입니다.


오일장이면 공주 읍내에서 엄마가 '튀밥'을 잔뜩 만들어 오십니다. 쌀을 튀겨 오면 '쌀 튀밥', 옥수수를 튀겨 오면 '옥수수 튀밥'. 그중 제일 별미는 '누룽지 튀밥'.

서울에 오니 '뻥튀기'라고들 하던데, '튀밥'이 제 고향 사투리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당시의 튀밥 맛은 요즘으로 치면 음... 팝콘은 말고 마카롱쯤 되려나요? 마카롱은 달콤한 가루라도 잔뜩 묻어있지만, 소금간만 겨우 입힌 그때 튀밥일 뿐인데 그 바삭하면서도 부드럽게 씹히는 맛은 환상이었답니다. 당시의 어린 제 입에는.


그 맛있는 튀밥을 집에서 제일 높은 선반 위에 올려놓고는, 우리들 간식으로 한 바가지씩 꺼내 나눠주곤 하셨지요.


엄마가 집을 비우면 오빠들이 나를 무등 태워 그걸 꺼내게 했어요. 그래 놓고는 꺼낸 건 난데, 자기들은 두 주먹씩을 먹고 내게는 달랑 한 주먹만 줍니다. 얼마나 오빠들이 밉던지, 내가 커서 어른 되면 그때 오빠들 두고 보자며 별렀죠.


시절의 맛이었을까요?


그런데 무조건 어른만 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고 돈을 벌어야겠는데, 뭘 해서 돈을 버나 궁리해 봐야, 그 시절 시골에서 직장 생활이라는 건 아무리 둘러봐도 아예 없고, 공부를 엄청 잘해서 교사가 되는 거 말고는 여자가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구요.


하지만 교사가 된다는 건 낙타가 바늘귀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고, 오랜 고민 끝에 제가 잘하는 수예사가 돼야겠다, 그런 꿈을 꾸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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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예의 끝은 엄마의 금지 강요와, 이어진 결혼, 그리고 시집살이었어요. 아, 좌절된 돈벌이. 하지만 팔자소관이라고 끝내 제 이름을 건 한복점 여사장이 됐답니다. 그것도 무려 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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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도 제법 많이 벌 수 있었어요. 속으로, '많이 늦었지만 이제야 꿈을 이루었구나!' 하며 스스로 대견해 했답니다. 한복을 지을 때마다 제 옆에는 늘 건빵과 튀밥을 쌓아놓고 먹는 게 일상이었죠. 오죽하면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사장님은 건빵과 튀밥에 한 맺힌 일 있는 거죠?"


그런데요. 이제 오빠들에게 제대로 복수를 해야겠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무리 이런저런 건빵을 사 모으고, 별스런 튀밥을 잔뜩 튀겨서 먹어봐도, 어린 시절 못된 오빠들한테 구박당하면서 얻어먹었던 건빵과 튀밥만큼 맛이 없네요.


역시 구관이 명관이라 그런가요? 아니면 세월의 맛이었을까요?


그 시절 건빵과 튀밥의 맛이 그리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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