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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현 Oct 20. 2024

무너지면 버티고 일어나.

B13-12층. 그 사이 어딘가를 오르고 있는 나에게.

과거를 잊어야 현재를 살 수 있고,
 현재를 살아야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현재 이런 내 다짐은 무너졌다.


일상이 무너지기 시작한 건, 앞서 일어난 사건때와 비슷하지만 또 다른 중압감인 사건이 더해져서였다.

이번엔 저번과 다르게 이미 예상은 했지만 받아들이기가 버거웠다.


생각보다 너무 쉽게 무너져서, 그동안 쌓여오던 억압된 감정들이 소용돌이쳐서 마음속에 들어왔다.

내가 이렇게 힘들게 오르고 있는 이 계단들도 버거운데, 과연 나는 이곳을 벗어나 새로운 층으로 올라갈 수 있을까? 라는 물음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아무도 없는 계단을 스스로 올라가야 했다. 여기서 무너지게 되면 이 계단은 미끄럼틀처럼 변할 것이다.

그러면 올라간 만큼보다 어쩌면 더 내려갈 수도있다. 내려가는 과정은 지나간 과거를 계속 회상하고 수많은 장면들이 머릿속에 맴돌며 내 눈앞에 펼쳐지는 한 편의 영화가 될 것이다.


그걸 모두 본 순간. 아주 조용히, 아늑히, 앤딩 크래딧과 함께 주변이 고요해지며 다시 어둠이 찾아올 것이다.

그 뒤 '정신을 차리면 또다시 B23층 이겠구나.'라는 확신이 들었다.

무너지면 안 되겠다 생각했다. 주변에 응원을 해주는 사람들이 더 많이 생기고 있다.


버텨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으므로 이 악물고 버텨야 했다.

그렇게 다시 일어나기로 다짐했다.



서울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광역버스를 탈 때면, 나는 항상 열린 버스문을 통과해 계단을 3칸 오르고, 카드 리더기에 핸드폰을 갖다 댄다.


'삐' 소리와 함께, 버스 입장을 환영한다는 버스만의 환영인사를 듣고 버스기사님께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를 한다. 그 후, 곧바로 고개를 들어 왼쪽칸에 자리가 있는지를 확인한다.


서울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의 왼쪽칸은 명당자리다.

대학생 때부터 수없이 타 본 이 광역버스의 배차시간은 악랄하지만, 왼쪽칸에 자리가 있어서 앉게 되면 버스를 기다렸던 시간도 무색하게 눈이 호강한다.

왼쪽칸에 앉아 제일 좋아하는 노래를 한 곡 듣기 하며 버스가 출발하기를 기다린다.


그렇게 대교를 건더 올림픽대로로 진입하는 순간. 나를 위한 한강의 퍼레이드가 시작된다.


오른쪽 통창으로 보이는 풍경은 한강이 보인다. 어두워지면 한강의 자태는 잘 보이지 않지만, 그 주변에 떠오른 찬란한 빛들은 불꽃놀이를 연상케 했다.

심지어 달리는 버스에서 보는 이 빛축제는 이제 시작이다. 한강 넘어 반대편에 있는 가로등 불빛이 대교의 밑에 있는 철기둥들에 가려졌다가 다시 보이며 반짝이는 자태는 언제 봐도 아름답다.


이 풍경을 보고 있으면,  일시적인 도파민을 주는 핸드폰조차 관심을 끄게 된다.

수없이 많은 가로등 불빛이 반짝이는 향연에 젖어 있노라면, 어느 순간 집으로 가는 거리는 절반이 줄어있다.

과거에 나는 이 장면을 수없이 많이 봐왔다. 그때도 아마 지금과 같은 생각을 했을 거다.


찬란한 불빛처럼 빛나는 사람이 되어보자.


그 꿈을 아직은 못 이룬 것 같지만... 말이다.


오히려 어둠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다행히 어둠 속에서 손을 내민 건 다름 아닌 나였다. 내가 스스로 일어나서 무언가를 해야 이 세상도 나에게 무언가를 내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는 상담센터를 방문했다.

흑백 같던 감정들은 어느새 버스에 비친 불빛처럼 각양각색의 색깔을 띠었다.

모두가 다른 감정들이었다는 걸 그때 새롭게 느꼈다.

감정을 너무 억누르는 게 안 좋다는 말을 들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술담배도 안 하는 나에겐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름, 잘 헤쳐나가고 있다 생각했건만.. 아니었나 보다.

지나간 과거를 다시 회자했다. 사연을 듣는 선생님께서는 연신 경악과 당혹스러움을 내비치셨다.

그러고는 안타깝다고 하셨다. '세상에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을 같다.'라고 하셨다.


맞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들에 대해 원망은 거둔 지 오래라고 말씀드렸다.

그렇게 과거를 점점 잊고 미래로 나아가고 있노라고 말씀도 드렸다.

그랬더니, 스스로에 대한 과거 회피가 있지만 과거를 억지로 묻는다고 모든 게 없어지는 건 아니라는 말을 들었다. 과거를 잘 보살피고 다듬어야, 더 이상 미련 없이 보낼 수 있을 거라는 그 한 마디가 가슴에 와닿았다.

비록 아직 흙탕물 싸움보다 더 더러운 싸움이 남아있지만, 이 또한 다 지나가서 뒤돌아보면 그저 인생에 하나의 풍파였으리라. 생각하면 된다고 하셨다. 그게 머나먼 일 같지만, 모든 게 다 끝나고 나서 뒤돌아본다면 후회 없이 끝날 거라고도 하셨다.


그렇다. 지금 갖고 있는 감정들을 언제까지고 눌러서 압축할 순 없었다. 그렇게 억압하면 어떻게든 용수철처럼 어느 순간 '펑'하고 뛰어올라 그 감정들이 다시 현실에 마주할 예정이었다. 현재를 살기 위해 억제한 감정들이 발목을 잡을 거란 생각을 하지 못한 내 실수였다.


그래도 해결책을 알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상담 시작 전 내어준 이름 모를 차가 식어 차가워질 때까지 대화는 끊기질 않았다. 차가운 차도 나름 먹을만했다. 뜨거웠던 감정들이 상담 후에는 이름 모를 차처럼 차갑게 식어서 그런가 보다.


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서는 선택에 대한 당부를 말씀해 주셨다.

물론 선택을 잘한다 생각했겠지만, 이러한 결과가 나오게 된 것도 결국은 운도 안 좋았지만 선택에 대한 오류가 있었던 게 문제였다고 하셨다.


선택.

앞서 인생은 무한한 선택의 연속이라고 글까지 썼건만, 단 한 번의 잘못된 선택으로 이렇게 지하실을 맴돌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저절로 끄덕이는 고개를 다시 제자리에 놓고 나자 선택의 기준을 다시 정립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심리상담을 받은 후, 나온 발걸음은 여느 때보다 가벼웠다.



오늘도 곧 결혼을 한다는 후배의 초대로 청첩장 모임에 다녀왔다.

지난 과거 청첩장 모임을 했던 내 과거로 후배의 모습을 통해 회상됐다. 나도 그때 그랬구나,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결혼식을 준비하며 예비신랑과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오히려 보기 좋았다. 사람 냄새나는 그런 연애와 곧 다가올 결혼이 눈부셔 보였다.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방법은 지하철로만 오는 방법과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는 방법이 있었다.

나는 고민하지 않고 바로 후자를 택했다. 오랜만에 서울에 나갔으니, 돌아오는 길에 퍼레이드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했다. 그렇게 돌아오는 버스는 승객도 별로 없어서 왼쪽칸은 많이 비워져 있었다.

버스의 가장 중간에 앉아 돌아오는 내내 시선을 오른 켠에 두고 생각에 잠겼다.


선택.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하지만 잘못된 선택을 하면 '처음으로 돌아가시오'라는 부루마블이라는 보드게임의 황금열쇠처럼 인생을 리턴해야 한다. 실제로 다시 돌아갈 순 없다. 시간은 이미 지나갔지만,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감당해야 하고 인정해야 한다.


과거의 나는 수많은 항아리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많고 많은 항아리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는 압박감과, 내가 보기엔 다 거기서 거기 같은데 굳이 골라야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그렇게 눈썰미가 있을 거란 생각으로 모든 항아리들을 돌아봤다.

너무 이쁘고 세련된 항아리는 오히려 거부감이 들었다. 경계했다. 그렇다고 모양이 이상하고 모난 게 있는 항아리 또한 빠르게 지나쳤다. 그렇게 고르고 고른 내 항아리는 나중에 알고 보니 밑부분이 깨져있더랬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맑은 물을 저 멀리서부터 힘들게 길어와 항아리에 채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힘들게 길어온 맑은 물이 나도 모르는 사이 줄어들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더 웃긴 건 깨진 틈으로 흐르는 물이 더러운 진흙으로 된 땅을 타고 흘렀는데도, 누군가는 그 물을 마셨다.


내가 노력해서 얻은 물을 오래오래 마시려고 보관했건만, 밑 빠진 구멍을 통해 탁해진 물을 누군가는 그래도 물이라면서 마셔댔던 것이다. 어처구니없지만 내 선택의 잘못도 여지없이 책임이 있다는 걸 다시금 느꼈다.



신기하게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노라면, 이런 심오한 생각들에 잠긴다.

버스를 타고 한강의 퍼레이드를 보면 과거의 영광부터 쇠퇴, 다시 재건하는 모습을 회상하게 된다.

그렇게 20분 남짓의 감상에 끝나면 도착지점에 버스가 도착해 있다.


오른쪽에 있는 통창으로는 더 이상 한강이 보이지 않고, 익숙한 건물들이 보였다. 정신을 차리고 'STOP'이 쓰여있는 버튼을 누르면 '다음 정거장에 내려줄게요.'라는 버스의 암묵적인 신호벨이 울린다. 목적지에 도착하고, 버스가 멈추면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작은 통로를 지나 앞으로 걸어간다. 버스 운전기사님께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카드 리더기를 찍는다. 계단 3칸을 다시 내려가면서 버스의 문을 나가면 새롭지만 익숙한 광경과 함께 사뭇 달라진 공기가 폐 속으로 들어온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회상이지만 버스가 나를 서울이라는 과거의 지점에서 현재라는 목적지까지 태워왔듯, 회상했던 모든 것도 이미 흘러가 버린 과거이다.

아직 스스로 해결해야 할 일들이 많이 남았지만, 그 앞에 놓인 감정들에 더 이상 외면하지 말아야겠다 생각하는 하루였다.


언젠가 이러한 과거의 일들을 다 해결하고 나면, 얼마나 홀가분해질까?

어서 그날이 왔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그때는 꼭 내가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이제 뒤돌아볼 필요 없이.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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