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나비 62화
불 속성을 탄 작은 금은 무섭게 몸집을 키워나갔고 안쪽 깊은 곳까지 뿌리내렸다. 확연히 내구성이 약해지긴 했으나 아직은 때가 아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체력이 바닥나기 전에 할 수 있는 만큼 해야 된다.
아담한 기포조차 없었던 벽에는 이젠 적지만 확실히 빛나는 붉은빛이 맴돌기 시작했다. 자그맣던 통로는 성인 남성도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크기를 넓혔다. 아직 부족한 듯싶었으나 더는 내 체력이 감당할 수 없었다.
숨을 겨우겨우 고르며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피가 고인 상처가 새겨진 주먹에 영원히 맴돌 것 같았던 불 속성은 오른쪽 발로 자리를 이동하였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퍼지는 붉은빛이 미세하게나마 주위의 얼음 속성을 녹였다. 벽에 중간쯤 이르렀을 때 바로 앞에 계시는 천 팀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놀라신 건지 걱정하시는 건지 모를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다시 한번 숨을 깊게 뱉었다. 어릴 때 태권도를 따로 배운 적은 없지만 발을 사용하는 법을 어설프게나마 사부에게서 배웠다. 그 당시에는 해야 될 필요를 느끼지 못했는데 이게 이렇게 쓸모가 있을 줄이야.
준비를 마친 발이 하늘을 향했다. 불 속성을 입은 채 붕 비행하는 발이 일자를 이루고 기어이 위에 있는 천장을 뚫고 넓게 퍼진 균열이 닿자 그 속에 있던 불 속성과 발을 감싸던 불 속성이 만나 커다란 화마를 일으켰다.
콰과광 - !
후두둑, 머리 위로 떨어지는 커다란 얼음 조각들을 가뿐히 옆으로 던져내었다. 역시, 타 태워버리는 것까지는 무리군.
“……무모해.”
붉은빛이 미묘하게 맴도는 얼음 조각 하나를 주우시며 인상을 찌푸리신 채 천 팀장님이 말씀하셨다. 한순간에 긴장이 풀린 탓일까, 양손에 새겨진 상처가 조금씩 통증을 흘려보내었다. 반짝이는 빛을 담은 불 속성이 핏속에 녹아내지 못해 밖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래도 잘했어. 원래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이번 기회에 말해보자면, 일단 순간 판단 능력이 뛰어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수로 현재 벌어지는 상황을 너무 잘 이겨냈어. 짧은 시간에 대처도 잘했고 실행하는 능력도 좋고.”
천 팀장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시며 나를 보시곤 옅게 웃어 보이셨다.
“대단한데, 이도헌.”
“감사합니다.”
천 팀장님을 향하던 시선이 문득 뒤에 있는 연희에게로 옮겨졌다. 인화의 옷자락을 살며시 잡아당기며 무언갈 이야기하는 연희의 말을 듣던 인화가 무슨 일인지 화들짝 놀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내 눈동자를 향하지 않는 인화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그 끝은 상처 난 내 두 손이었다. 급히 손을 등 뒤로 숨겨보아도 이미 늦었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다쳤느냐, 도헌아.”
김 선생님이 서둘러 내게로 걸음을 옮기셨다.
“어디가, 어떻게? 단순 상처야, 속성으로 인한 상처야?”
“아, 그냥 살짝…… 까졌습니다.”
질문을 늘어놓으시던 김 선생님은 등 뒤에 있던 내 손을 조심스레 잡으시며 상처의 상태를 대강 확인하셨다. 대충 봐도 불 속성의 잔해가 확실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냥 까지긴, 속성으로 인한 상처구만. 감춰서 좋을 게 없는 거 잘 알면서 뭘 그리 숨기느냐. 응?”
김 선생님의 꾸중에 나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더 심해지기 전에 어서 김 원장에게 가보거라.”
상처에서 유발되는 통증 탓인지 일시적으로 부작용이 사라졌다. 손의 떨림도 조금은 멎었고 심장의 압박도 잠시 멈추었으며 예민하게 일어난 온 신경이 상처 속 깊이 스며든 속성에 집중하고 있었다. 한시적으로나마 억제제를 자처하는 상처를 나로서는 굳이 지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억제제의 기간이 만료되면 후에 큰 부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고, 한동안 손을 사용하지 못할 수도 있으나……, 그것도 순간뿐일 테니까.
내가 여기서 층을 벗어나 엄마에게 치료를 받고 다시 돌아오면 시간이 너무 지체된다. 그사이 억지로 눌러졌던 부작용이 대폭 폭발해 버리면 그대로 끝나는 거지.
겨우 두 개의 층을 따라준 명운에 운명을 맡기며 가까스로 통과했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명운에 놓여진 나에게 절로 굴러들어온 이 기회를 내가 놓칠 리가. 속성 대표님들과 아버지가 관여하시는 이 훈련이 내게 얼마나 중요한 기회인데.
아버지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아니 대견함을 담은 아버지의 눈빛이 잠시라도 나를 향하기만 할 수 있다면 못할 게 뭐가 있겠어.
겨우 훈련인데 왜 이렇게까지 진심을 다하냐고. 그깟 아버지의 인정이 뭐라고 그렇게 안달이냐고 생각하는 이도 있겠지. 하지만 나에겐 겨우 훈련, 그깟 아버지의 인정이 아니다.
사부랑 한 약속이 있으니까.
‘열심히 해서 언젠가는 꼭 아버지한테 칭찬받을 거니까 잘 지켜보셔야 돼요, 사부? 아버지한테 칭찬받고 사부한테도 칭찬 많이 받을 거니까!’
‘하하, 그러마. 지겨울 때까지 한껏 칭찬해 주고 이뻐해 줄 테니 그때 와서 귀찮다 피하기 없기다.’
아버지에게 칭찬받는 날, 사부에게도 칭찬받기로…… 약속했으니까.
어린 시절 잔뜩 부푼 마음으로 한없이 사부에게 응석 부리던 평화롭고도 평범한 어느 날, 스쳐 지나가듯 한 약속을 어찌 저버릴 수 있겠는가.
“김 선생.”
천 팀장님의 목소리에 김 선생님을 따라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김 선생님을 향해 뻗은 손 위에는 시약병 같은 유리병이 있었다.
“뭐야, 천 팀장이 해 속성을 왜 들고 있어?”
병 안에 들어있는 것은 고고히 날빛을 품은 채 온화하게 빛나고 있는 해 속성이었다.
“혹시 몰라서 김 원장한테 받아 왔어. 뭔가 한 명은 무조건 다칠 것 같아서.”
김 선생님은 한참을 천 팀장님의 손에 들린 해 속성을 그저 가만히 바라보시더니 시선을 천 팀장님에게로 살며시 입꼬리를 말아 올리셨다.
“너, 설마 애들 다쳐도 시말서 쓰기 싫어서 김 원장한테 미리 해 속성을-”
“그렇겠냐? 하여튼 생각은 장난 아니게 꼬여가지고.”
“너만 할까?”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하신 채 김 선생님이 해 속성이 담긴 병을 가져가셨다. 탁, 뚜껑이 명쾌하게 따짐과 동시에 해 속성이 천천히 병의 벽을 타고 내려올 순간이었다.
쉴 틈 없이 바로 이어진 듣기만 해도 아픈 퍽 소리, 그리고 그다음은…….
“억!”
반사적으로 높이 든 김 선생님의 손에 아슬아슬하게 해 속성이 밖으로 흐르지 않고 병 안으로 모두 들어갔다. 의연히 내려간 고개를 다시금 드신 김 선생님은 하, 짧게 헛웃음을 지으셨다.
“천유하 성깔 진짜…….”
발뺌이라도 떼시는 듯 천 팀장님은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돌려 유하와 인화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셨다.
“그래, 사람이 변하면 죽을 때가 다 된 거라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시며 김 선생님이 내 손에 위로 천천히 병을 기울이셨다. 상처에 해 속성이 닿자 따스한 온기와 함께 약간의 통증이 추가로 더해졌다.
“넌 무병장수하겠다, 천 팀장. 그 성깔 어디 안 가니까. 이야, 수명 좀 나한테 나눠주면 안 되냐? 이 세상 사람들한테 다 수명 조금씩 나눠줘도 넌 백년해로 살 거 같은데.”
“……그, 김 선생님.”
“응?”
“뒤에…….”
“뒤에?”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을 꺼내어 김 선생님에게 알렸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천 팀장님이 발로 확 차버리신 얼음 조각 하나가 매서운 속도로 날아와 김 선생님의 등을 정확히 가격하였다. 그대로 충격을 고스란히 흡수해 얼음 조각은 곧장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얼음 조각이 파편이 되어 바닥에 떨어지는 동안 김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
멍하니 시선을 앞에 두시던 김 선생님이 목소리를 꺼내신 건 한참 뒤의 일이었다.
“……나, 방금 뭐 맞았냐?”
“……네.”
“천유하한테?”
작게 주억거리는 고개에 김 선생님이 실성하신 듯 몇 번 웃음을 지으시고는 어느새 말끔히 나은 내 손을 확인하셨다.
“음, 다행히 다 나았네. 그래도 위층에서 훈련 진행할 때는 조금 조심해서 사용하고.”
“네. 감사합니다.”
“자, 그럼…….”
느긋느긋 자리에서 일어나신 김 선생님은 뒤를 돌아 천 팀장님을 바라보셨다.
“유하야.”
“성 떼고 부르지 마. 징그러워.”
잔뜩 구겨지는 천 팀장님의 인상에 어째선지 김 선생님은 더욱 신나 보이시는 듯했다.
“훈련 끝나려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 오랜만에 대련 한판 할까?”
“대련?”
“응. 우리 어릴 때 서로 대련 많이 했었잖나. 근데 생각해 보니까 너랑 붙어본 건 그리 많지 않은 거 같아서. 마침 타이밍도 기가 막히니까.”
잠시 아무 말씀 없이 김 선생님을 바라보시던 천 팀장님의 입가에 미세한 미소가 띠였고 주위에는 더없이 날카로운 얼음 조각들이 떠다녔다.
“자신은 있고?”
“물론이지.”
즉시 김 선생님의 손에 훈련을 진행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밝은 빛이 섞인 물 속성이 맴돌았다.
“통과다, 도헌아. 위층으로 올라가 봐도 좋아.”
“네, 그럼…….”
괜한 불똥 튀기 전에 어서 올라가 봐야겠군.
두 눈동자를 반짝이며 천 팀장님과 김 선생님을 바라보고 있는 연희의 옆에 앉아 있는 인화와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최 소장님이 계시는 삼 층으로 서둘러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