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좀 다르지 않나요?
누군가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하느님은 인간이 슬프고 좌절할 때 옆에서 바라보시며 가슴 아파하신다고.
위로가 되어야 할 말이었을 텐데, 한참을 가만히 있게 되었어요.
사람이 옆에 앉아 같이 울어주면, 그건 좀 다르잖아요. 그 사람에게는 그게 전부니까요. 할 수 있는 것의 끝에서, 그나마 할 수 있는 것. 그건 사랑이라 불러도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신은 좀 다르지 않나요. 할 수 있는 존재가 하지 않는 것과, 할 수 없는 존재가 그나마 하는 것은 같은 자리가 아니거든요. 하나는 선택이고, 하나는 한계예요. 선택이라면 이유가 있을 텐데,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교회에서는 뜻이 있다고 말하죠. 아마 그렇겠지요. 다만 그 말 앞에서 가끔 멈추게 되는 건, 내 고통에 뜻이 있다는 말이 결국 누군가의 계획 안에 이 불행이 들어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잖아요.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나에게 오너라. 쉬게 하리라.
그래서 갔어요. 던지려고 했어요. 그런데 잘 되지 않더라고요.
짐이라는 게 내가 원해서 진 것만은 아니에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 선택은 내가 한 거예요. 사랑하겠다고 한 것은 나였으니까요. 다만 그 사랑이 이런 무게가 될 줄은 몰랐어요. 먹여살려야 하니까, 지켜야 하니까, 어느 순간 어깨 위에 올라와 있었어요. 그런 짐을 내려놓으라고 하면, 좀 막막해져요. 무엇을 내려놓는다는 건지.
놓으면 내 사람들이 흔들리고, 지면 내가 흔들려요. 그 사이 어딘가에 서서, 조용히 묻게 돼요.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돌아오는 말은 — 가슴이 아프시다는 거예요.
마르틴 루터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하죠.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이 말이 오래 남는 건, 아마 응답을 전제하지 않기 때문일 거예요. 세상이 끝나는데 사과나무를 심는 건, 열매를 기대해서가 아니잖아요. 그냥 심는 거예요. 그것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전부이니까요.
그러면 질문이 조용히 바뀌어요. 나의 사과나무는 무엇일까.
아직 모르겠어요. 다만 한 가지는 어렴풋이 느껴요. 응답이 오지 않아도 심어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찾는 과정이, 어쩌면 기도일 수도 있다는 것.
가슴이 아프시다는 말이 아직도 좀 허탈해요. 그런데 허탈하다는 건, 아직 기대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거든요. 완전히 돌아선 사람은 허탈해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매일, 묻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