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의 추억
우르르 수돗가로 몰리는 아이들이 수도꼭지에 입을 벌리고 물을 들이키며
거친 숨을 몰아 쉬고, 특히 남자아이들은 머리까지 감으며
얼굴을 타고 줄줄 흐르는 물을 연신 훔쳐낸다.
마스게임 연습이 끝나고 여자 아이들은 고전무용, 남자아이들은 차전놀이
연습 시간이 연달아 꽉 채워져 있다.
내일이면 운동회가 열리기에 선생님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채찍만 안 들었지
오늘 흡족하게 안 끝내면 집에 안 보낼 것만 같다.
내 짝꿍 삼일이는 마스게임 내내 얼굴이 발그레 홍조를 띠고 손도 제대로 못 잡고
마스게임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여자 아이들은 고전무용을 한다는
선생님 말씀에 슬그머니 옆으로 와서는 "아까 마스게임 때 손 못 잡은 거 집에 가서
이르면 안 돼!" 하는 거였다.
사실 삼일이와 우리 집은 가까운 사이지만 쑥스러워서 말도 못 걸어오는
순한 성품을 지닌 친구다. 왜 그렇게까지 부끄러운지 모를 일이지만...
그렇게 고전무용 연습에 들어갔는데 왜 그리 족두리는 이마 밑으로 흘러내리는지,
내 키가 중간쯤이니 다행이지만 앞에 서서 춤을 추는 작은 친구들은
벌써 단상 위에서 보고 있을 내빈을 의식하며 누구를 위한 운동회냐며 불만이다.
차전놀이 연습을 하는 남자아이들은 세상이 다 끝날 것처럼 젖 먹던 힘까지 써가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맨 꼭대기에서 상대방 대장과 힘을 겨루던 순길이는 평상시에는 부끄러워서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던 내성적인 성격은 어디로 가고
야생의 하이에나처럼 포효하는 게 가을하늘을 뚫을 기세다.
그렇게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차전놀이를 빙글빙글 도는 고추잠자리의 응원까지
가세하며 마무리된 운동회 연습이 끝이 나고
우리는 물에 빠진 솜을 한 뭉치씩 어깨에 걸치고 무사히 집으로 갔다.
드디어 그동안의 노력이 결실을 보게 되는 그날이 왔다! 가을 운동회!
집집마다 아랫목을 차지하고 있던 감이 그 뜨거운 베일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빛깔의 우린감으로 도도하게 등장하고,
솜씨 좋은 엄마는 모시잎을 뜯어다 만들어 놓은 송편까지 이웃들과 나누어 먹으려고
이것저것 많이도 준비하신다.
그런 엄마의 모습과는 달리 나는 내심 엄마가 학교에 안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안 낳으려고 버티고 버티다 노산으로 낳은 건데 친구들 중에 우리 엄마가 제일 나이가 많아서 싫었다.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 봇짐을 풀고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본격적인 응원이 시작된다.
엄마들을 따라온 동생들이 시도 때도 없이 불어대는 나팔소리가 행상을 나온 장사꾼들의
외침과 함께 가을하늘에 흩어지고 있다.
수돗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며 연습을 한 보람이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와
부모님들의 칭찬 릴레이로 증명되어 우린감을 하나씩 들고 아작아작 씹어대고
다니는 친구들의 얼굴은 연신 함박웃음이다.
마지막 하이라이트가 펼쳐지기 전까지는 나 또한 그런 모습을 하고
친구들과 어우러져 운동장을 누비고 다녔다.
드디어 마이크를 통해 들려오는 선생님의 목소리 "자! 지금부터 부모님들 계주가 시작되겠습니다."
하루종일 지치지도 않으신지 선생님의 목소리는 여전히 우렁찼다.
가만히 계시면 좋을 텐데 우리 엄마는 씩씩하게 운동장을 향해 걸어 나가신다.
사실 호리호리한 체구지만 달리기 하고는 거리가 멀다.
안 봐도 벌써 뚱뚱한 삼례엄마가 꼴찌일 테고 우리 엄마가 그 앞일게 뻔한 일이다.
삼례엄마가 다이어트에 성공만 한다면 그다음은 생각도 하기 싫다.
아니나 다를까 눈뜨고는 차마 볼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기 시작했고
나는 조마조마해서 얼른 플라타너스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어떻게 알았는지 삼일이가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으로 내 앞에 서서
"너네 엄마 꼴찌에서 첫 번째!" 이러는 거였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참가하는데 의의가 있는 거지!"
기분이 안 좋지만 삼일이 또한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신경을 써주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다른 표현은 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꼴찌에서 첫 번째 한 것 치고는 상품이 푸짐하였다.
엄마는 너무 행복해했고 다리가 아파서 내일 못 일어나는 것 아닌가 하고 걱정하신다.
나도 사실 내일 학교에 가면 아이들의 관심사가 우리 엄마 달리기일 게 뻔한 일이지만
그 또한 삼일이가 방패막이가 되어 주리란 걸 잘 알고 있다.
하루종일 소음에 시달리던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그 와중에도 열심히 독서 중인 안데르센 등,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동상들을 뒤로하고 우리는 이런저런 이유로 받은
상품들을 들고 집으로 달려갔다.
가을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아 운동회를
즐기던 그때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승부와는 상관없이 하루를 운동장에서 소통하고 안부를 묻는 따뜻한 정이 오가던
가을 운동회... 한 계절을 지나면서 따뜻한 추억 하나쯤 꺼내 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