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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핸디앤디 Oct 16. 2024

불편한 손님, 고마운 손님

     사람 속에 살다 보면 우연이든 필연이든 마주치는 사람이 있다. 그 우연이 한 번으로 족한 사람이 있고 필연이 되어 매일은 아니더라도 자주 봐야 하는 사람이 있다.

     그 들은 둘로 나뉘게 된다. 불편한 사람과 고마운 사람으로 다가왔다가 사라지곤 한다. 그 시간은 순간이 되기도 하고 긴 기간이 되기도 한다. 불편함은 순간이 되었으면 좋겠고 고마움은 지속되길 바랄 뿐이다. 그러나 불편함은 익숙해지면 그 불편함을 느끼지 못할 때가 오고 고마움은 당연해져서 그 고마움을 잊게 되기도 한다.


     불편함과 고마움은 상반된 감정이다. 그런데 그것들이 지속되면 하나의 감정으로 귀결된다. 무감각.


     새벽 4시와 다섯 시 사이에 매일 오시는 손님이 있다. 내가 근무하는 평일에만 오시는 줄 알았는데 주말 근무자를 대시하여 일을 하던 새벽에도 그 손님을 만났다. 비가 오는 날에도 어김없이 우산과 함께 오신다.

     몸이 불편하신 분이다. 묻는 게 예의가 아니기에 묻고 싶었지만 묻지는 못했다. 아직도 그분이 몸의 한쪽 부분이 불편하신 이유를 알지 못한다. 안다고 해도 뭐가 달라지겠는가.


     그 손님이 처음 우리 편의점에 들어오는 순간의 내 마음을 기억한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무거운 유리 출입문을 밀고 들어 오는데 시간도 걸렸지만 혹시나 다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 걱정은 우리가 흔히 느끼는 가족들이나 아이가 다칠까 봐 하는 그런 걱정이 아니다. 내 속에서 나온 걱정은 괜한 일거리나 번거로움이 생기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라기보다는 우려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다행히 이 정도쯤이야 하는 익숙한 모습으로 출입문을 들어선다. 그러고는 출입문 옆 테이블에 지팡이를 걸쳐 놓으시고 숨을 한 번 고르신다. 그 긴 숨에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편의점까지 오는데 들인 노력과 성취감이 섞여있음을 짐작케 한다.

     계산대로 바로 오셔서 내리는 따뜻한 커피를 한 잔 주문하셨다. 참고로 여기는 편의점이고 나는 편의점 야간 근로자다(혹시나 잊으셨을까 봐). 편의점의 내리는 커피는 셀프다. 계산을 마치면 직원이 건넨 종이컵이거나 커피머신 위에 있는 컵을 커피머신에 받히고는 기계를 작동시킨다. 자주 드시는 분들은 취향에 따라 시럽도 넣으시고 뜨거운 물을 섞기도 하신다. 대부분 처음 드시는 분들도 잘하신다.

     하지만 이 분은 몸이 불편하신 분이다. 거기다 처음 오신 듯했다. 우연이도 나와 이 편의점에서 손님과 직원으로 처음 만나게 된 것이다. 몸의 한쪽 부분, 그러니까 한쪽 팔과 다리에 감각이 없으신 듯 매우 행동에 제약이 많은 분이다. 

     일반적인 상품을 들고 오시기만 하면 바코드 찍고 계산해 드리면 그만이다. 약간의 시간이 더 걸리고 신경이 쓰일 뿐이지만 내가 추가로 해야 할 일은 없다. 하지만 커피다. 뜨거운 커피. 쏟을 수도 있고 쏟는다면 데일수도 있다. 더군다나 커피머신 작동 방법도 모른다고 하신다. 어쩌겠나, 도와 드려야지. 바쁜 시간도 아니고. 4시부터 5시 사이에는 손님이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없다. 물론 내가 1차 청소를 마치고 한가로이 책도 읽고 출출한 배도 달래는 시간이다. 그런 시간에 매몰차게 '알아서 하세요'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커피 컵이 뜨거우신지 홀더를 꺼내서 끼우려 하신다. 위험하다. 마비된 한 손에 홀더를 걸치다시피 하시고는 그 홀더에 방금 내린 뜨거운 커피컵을 끼우려고 하시는 모습에 놀라서 내가 해 드렸다.

    다음 날 또 오셨다. 같은 일을 반복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커피를 테이블 위에 놓으시고는 다시 일어나셨다. 뭐가 필요하신가 그분의 동선을 따라 내 시선도 함께 움직였다. 젤리 진열대에서 '저요, 저요, 내가 더 맛있어'를 외치던 녀석 중에 하나를 집어 계산대로 가져오셨다. 계산을 하시고는 테이블 의자에 앉으셔서 비닐봉지를 뜯는데 힘들어하는 모습이 또 눈에 들어온다. 가위를 가져가서 윗부분을 잘라 드렸다.

    이제는 그 손님이 들어오시면 계산대까지 오시는 동안에 종이컵에 홀더를 끼우고 커피머신을 작동시킨다. 자동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젤리 봉지를 들고 오시면 윗부분을 잘라 드린다. 젤리는 그날그날 달라지기 때문에 내가 가져오지는 않는다. 그건 좀 지나친 서비스 같기도 하고.

    

    나는 그 손님이 고맙다. 그렇게 오셔서는 30~40분 정도 앉아 계시다가 가신다. 당연히 처음에는 불편했다. 걱정 아닌 우려를 했고, 손길이 많이 가는 손님이니 일거리가 늘었다. 일반적인 손님이었으면 하지 않아도 될 일들이 그만큼 생겼다. 하지만 같은 일을 반복하다 보니 익숙해졌다. 어느 순간 몸이 자동으로 움직인다. 그게 불편함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고마워할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할 수 있다.

    그렇다. 고마울 것까지는 없다. 내가 손님한테 고마운 이유는 따로 있다. 그 손님이 오는 시간대는 나의 시간이다. 한가한 시간이다. 그러다 보니 책을 읽다가 졸거나 또 졸지 않으려고 유튜브를 본다거나 한다. 하지만 그 손님이 오시고 나서는 그런 일이 없어졌다. 그 손님은 자리에 앉아서 휴대폰으로 무엇을 보시는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앉아 계시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일어나 가신다. 가실 때도 꼭 허리 굽혀 인사를 하고 가신다. 그렇게까지 인사를 받을 만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하여튼 요즘에는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을 오롯이 책을 읽는데 쓰고 있다. 물론 중간에 손님들이 오시기 는 하지만 전처럼 대 놓고 졸거나 유튜브를 보는 일은 없어졌다. 어찌 보면 약간의 도움을 드리고는 만족스러운 한 시간을 얻었다. 때로는 과연 이게 옳은 일인가 싶을 때도 있다. 분명 규칙적으로 이른 새벽시간에 나오셔서 움직이신다는 것은 아마도 재활의 목적이실 텐데, 내가 몇 가지 일을 대신해 드린다는 것이 그분에게는 오히려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그 정도로 노력하시는 분이라면 당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은 거부하셨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일상생활에서 타인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상황은 아마도 배려하는 작은 선물을 받았을 때가 아닐까 싶다. 주택가의 넓지 않은 찻길을 건널 때 차를 일찌감치 멈추어주는 운전자, 문을 나서는데 뒷사람이 나올 때까지 문을 잡아 주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아주 많이 있다. 하지만 이미 익숙해져서 당연하다고 생각되어 잊혀 가는 배려라는 단어가 있다.


     배려는 타인을 위해 하는 게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어느 순간 우주를 돌아 나한테 돌아오는 부메랑 같은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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