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트 레이오프
실리콘밸리의 레이오프 열풍은 한때 거세게 불어닥쳤지만, 이제는 다소 잠잠해졌다. 하지만 그 여파는 건축 업계에도 뚜렷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2025년의 시작과 함께, 회사의 파트너들은 연말 동안 얼마나 열심히 프로젝트를 따냈는지를 자랑하며 분위기를 띄우려 했다. 새롭게 확보된 프로젝트들은 긍정적인 에너지를 불어넣는 듯했지만, 지난 몇 달 동안 사장급 직원 두 명이 떠난 사실은 여전히 무거운 현실감을 주었다.
나는 지난 2년 동안 8번의 레이오프를 겪었고, 그 과정에서 50명이 넘는 동료 건축가들이 떠나는 것을 목격했다. 미국에서의 레이오프는 잔인할 만큼 빠르고 냉정하다. 아침에 인사팀의 호출을 받으면, 점심시간 전에 모든 절차가 끝난다. 책상을 정리하고, 회사 계정이 비활성화되며, 몇 시간 안에 퇴사 절차가 완료된다. 이런 현실 속에서, 오후 팀 미팅에서 “여러분은 영향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었다.
그렇다면, 한국인 건축가로서 나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팀 전환, 프로젝트 이동, 순간적인 결단의 중요성.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다음은 내 차례일 수 있다”는 긴장감을 끊임없이 느끼며 살아왔다. 건축 업계에서 계속해서 살아남고, 더 나아가 성장하기 위해 어떤 준비와 적응이 필요했는지, 그 과정을 하나씩 되돌아보고자 한다.
내가 처음 입사했을 때 샌프란시스코 오피스에는 총 5개의 디자인 스튜디오가 있었다. 각 스튜디오는 중국과 아시아 시장에 큰 의존도를 두고 있었고, 그 지역의 대형 프로젝트가 회사 매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첫 번째 레이오프는 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나갈 무렵, 중국 부동산 시장이 침체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회사의 대형 프로젝트는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특히, 메인 스튜디오인 디자인 1실과 2실을 제외한 나머지 스튜디오들은 새로운 수익원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호황기 동안 폭발적으로 확장된 조직 규모는 이미 문제를 예고하고 있었다. 각 스튜디오는 최소 8명에서 많게는 30명에 이르는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시험대에 오른 이들은 주로 중간 레벨의 외국인 직원들이었다. 인원 감축은 각 스튜디오별로 이루어졌고, 디렉터의 판단에 따라 감축 대상이 결정되었다. 회사 내에서 누구를 남기고 누구를 내보낼지의 기준은 명확하지 않았지만, 디렉터와의 관계, 프로젝트 기여도, 그리고 시장 변화에 따라 유동적으로 적용되는 듯했다.
내가 속해 있던 디자인 5실은 첫 번째 레이오프의 충격에서 비교적 안전했다. 우리 스튜디오는 이미 두 명이 자발적으로 이직한 상태였고, 스튜디오를 이끌던 대만인 디렉터는 회사의 분위기를 잘 읽는 사람이었다. 그는 신규 채용을 줄이고, 기존 인력을 유지하며 “버티는 전략”을 선택했다. 결과적으로, 디자인 5실은 첫 번째 대규모 레이오프에서 큰 타격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시점부터 “다음은 나일 수도 있다”는 긴장감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첫 번째 레이오프 이후에도 위기는 반복되었다. 회사의 중국 시장 의존도가 높은 구조는 글로벌 경제 변화에 취약했고, 경제 침체와 프로젝트 부족이 맞물리며 추가적인 레이오프가 이어졌다. 나는 매 순간 내 자리를 지키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우선, 특정 프로젝트나 시장에만 의존하지 않고 다양한 분야와 지역의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내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했다. 또한, 팀 전환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회사 내에서 나의 유연성을 보여주었다.
첫 레이오프 속에서 나는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첫째, 새로운 기회를 받아들이는 유연성과 적응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팀 전환이나 프로젝트 이동에 적극적으로 응하며, 나는 회사 내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역할을 찾았다. 둘째,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특정 시장이나 프로젝트에만 의존하지 않고, 여러 분야의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내 역량을 확장했다. 셋째,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 동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내가 가진 강점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것이 내 생존 전략의 핵심이었다.
레이오프는 단순히 회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개인의 준비와 선택, 그리고 적응력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문제였다. 나는 위기의 순간을 단순히 생존의 기회로만 여기지 않았다. 그것을 성장의 발판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