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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이후, 또 다른 전쟁이 시작 됐다.

전쟁의 서막: 출산용품, 육아용품 지옥

by 글로업

"전쟁은 끝났어. 다시는 이런 비극은 없을 거야."


6.25 참전 용사, 나의 할아버지께서 어린 나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달빛 비치는 우물가에 앉아 전쟁 이야기를 하시는 할아버지의 목소리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시간이 흘러 내가 결혼을 하고,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고,

장례식장에서 마주한 할아버지의 영정사진에는 훈장이 함께 빛나고 있었다.


훈장은 마치 나에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전쟁은 이미 끝이 났다고.




어쩌면 할아버지의 소원이었는지도 모르는 그 말이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한 번씩 가에 맴돈다.







할아버지의 진심 어린 이야기 때문이었을까?


진짜 끝인 줄 알았다. 전쟁이.


휴전국가 대한민국에 몸을 담고 살면서도 이 땅에 전쟁은 없다고 굳게 믿어왔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도 하고, 결혼까지 하니 앞으로는 꽃길만 가는 건가 싶었다. 내 삶의 중요한 관문은 통과했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오예!!!! 드디어 끝났다! 내 인생 과업!!!)

(아닐 걸?)







축하드려요! 새로운 가족이 찾아왔네요!



산부인과 진료실.


의사 선생님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얘기했다.


첫 아이를 임신하고 곧 부모가 된다는 설렘도 잠시.


임신 10개월은 생각보다 금방 지나갔고,

막달이 되어가는 시점에 출산 준비물 리스트를 보며

출산 준비물, 육아 용품을 구입했다.


산모패드

수유패드

임부팬티

압박스타킹

마이비데

비판텐

빨대

모유저장팩

가제손수건

체온계

면봉

속싸개

겉싸개

손싸개

발싸개

배넷저고리

카시트

등....

(헉헉... 아직 다 못 읊음)


고등 래퍼 말고 애미 래퍼 프로그램이 있으면 출산준비물에 육아용품 리스트만 가지고 랩을 만들어도 1등을 하겠다 싶을 지경이다.


육아용품을 하나씩 온라인으로 주문하기 시작했다.



현관문 앞에는 매일 같이 택배 박스가 왔고,

어떤 날은 여기가 물류창고인가 싶을 정도로

택배가 많이 오기도 했다.

(까꿍)

(택배 기사님 기절 각)

(현실은 출근하는 남편 기절 각)



국 인터넷으로 모든 걸 사기가 어렵다고 판단해 집 근처 육아용품 할인 매장을 방문했다.


아기 세제

신생아 샴푸

신생아 로션

오일

쪽쪽이

젖병

젖병소독기

젖병 세척솔

젖병 세제....

(새로운 랩 시작)

(헥헥)


지갑이 얇아지는 소리가 매장 안에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들리는 듯 한 환청에 시달린다.


마치 카톡 알림처럼.

텅장! 텅장! 텅장!

(*텅장: 텅 빈 통장의 줄임말)



남편도 비슷한 환청에 시달리는지

초반에 신났던 마음은 사라진 듯한 얼굴이다.


신생아 용품이기에 성분 하나하나 따져가며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인생 최대의 꼼꼼함을 발휘해 본다.

(물건 하나 고르는 데 백만 년 ^^;;;)


이 때문인지 그의 말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피곤)


분명 밝을 때 들어갔는데, 계산대로 향하다 넘어다본 창문에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다.

(대체 몇 시간을 있었던......?!)



우리는 그나마 조카가 사용하던 유모차, 아기침대 같은 물건들을 많이 물려받았음에도 새로운 식구를 맞이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어마무시했다.


키 큰 남편의 손에 기다랗게 늘어진 영수증은 거의 땅에 붙기 직전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기차냐고....)


항목을 확인하고 카드값을 확인한 남편은 한숨을 쉬었다.

육아용품에 150만 원이 넘는 돈^^.

이게 말이 되냐고.

(신생아 회전형 카시트만 60만 원이 넘는다.)

(당근 중고 구매도 내가 필요한 시점에 내가 찾는 물건이 올라오지 못해 사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기기 마련...)

(당근 사냥 실패 비용이 이렇게나 컸다.)

(현타가 온다...)


남편이 계산한 물건을 사장님과 함께 봉지에 옮겨담는 사이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비정상인가?


온라인으로 검색을 해본다.


[네이버 출산용품 비용 AI브리핑 캡쳐]


와우!!


돈 무서워서 애 못낳는다는 저출산 국가의 현실이

실감이 난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음에 애도의 눈물 한방울)

(또륵)






매장에서 가장 큰 비닐봉지를 양손에 들고 걸어오는데 몇 걸음 못 가서 비닐이 찢어질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위태 위태)

아니나 다를까 샘플로 받은 일회용 로션 모서리가 봉지에서 탈출을 시도하다 그만 봉지 한쪽에서 툭 소리가 났다.


손 쓸 틈도 없이 봉지 안에 있던 물건들이 주차장 바닥으로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대환장 쇼를 동공만 커진 채로 지켜봤다.

(와오 어메이징......)

(나도 모르게 박수 칠 뻔)


"후드드득 탁!"


마지막 아기 세제가 굴러 떨어지고, 만삭의 몸을 최대한 낮춰 주섬주섬 주워서 트렁크로 옮긴다.


펭귄처럼 뒤뚱거리며 줍는 나의 뒷모습에서 싸함을 느낀 남편은 군대 시절보다 더 빠른 속도로 떨어진 물건을 주어 담았다.

(남편도 5G 시대)

(이렇게 안 움직이면 그날 밤에 황천길 5G)

(쿨럭)



아니 인터넷으로 시키지 그걸 왜....



돕지도 않을 거면서 주차장을 지나가던 행인이 한마디 툭 내뱉었다. 유난이라는 표정은 덤이다.

(우리 집 와서 택배 상자 뜯기 아르바이트하실....?!)

(크흡)



사 온 물건을 정리하는 데만 몇 주가 걸렸는지 모르겠다.

신생아 침대 침구류 세탁, 아기가 입을 옷, 수건 등등 세탁기 건조기 빨랫대를 활용해서 마치 우리 집이 세탁소인 것 마냥 매일같이 빨래하고 개고를 반복.


그마저도 빠진 물건이 있으면 당근으로도 사고,

온라인으로도 사고.

소비지옥이 시작되었다.

사도 사도 끝이 없는...


드디어 아이 맞을 준비가 되었다.

(올 것이 왔구나!!!)





축하합니다! 이제 세 식구가 되셨네요!


분만실에서 마주한 아기.


출산을 하고 나면 그간 고생이 눈 녹아내리듯 씻겨갈 줄 알았는데, 아이의 울음소리에 체력이 이미 방전 되는 기분이었다.

(누가 나 좀 살려주소)



4킬로가 넘는 우량한 신생아 덕분인지


캥거루케어를 하라며 가슴팍에 얹어 둔 아기의 무게에


앞으로 내 인생의 무게를 실감했다.

(숨 막힌다....)

(감동 느낄 타이밍에 감동 바사삭)

(대문자 T 애미 인증)

(쿨럭)



앞으로 내 육아 괜찮은걸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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