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기운에 깊이 잠이든 치치를 바라보며 너는 그대로 앉아있었다. 쓸쓸히 솟아오른 나무들이 줄지어 선 오솔길을 따라 휠체어를 밀며 오는 중년의 남자가 보였다. 휠체어에 앉은 노부인의 얼굴은 모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으나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개 유모차를 미는 사람들과 달리 남자는 수심에 찬 표정이었다. 그 표정이 낯이 익어 쳐다보던 너는 눈이 마주치기는 싫어서 자는 척 벤치에 기대어 고개를 뒤로 젖혔다. 나뭇잎들 사이로 햇빛이 어른대며 눈을 찔렀다. 눈을 감자 빛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남자가 미는 휠체어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숨죽인 채 기다리자 잠시 멈춘 것 같던 바퀴가 다시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잠에서 깬 치치가 칭얼대고 나서야 너는 눈을 떴다.
‘김영준 심리치료연구소.’
오롯이 떠오른 그곳을 너는 모른 척하지만, 기억하고 있었다. 재개발 예정의 아파트 상가에 자리한 그곳. 수리 중이라는 종이가 붙은 엘리베이터와 철물점, 네일샵과 문방구, 띄엄띄엄 빈 가게들과 고독한 계단. 낮인데도 저녁처럼 어두침침한 4층 복도에는 오직 김영준의 사무실에서만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던 광경을.
‘예술창작 활동 과정에서 심리적 ·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 예술인을 위한 심리상담 신청을 받습니다. 지원 자격: 예술인패스 소지자. 지역별 상담소 참조. 개별 마감.’
인터넷을 검색하다 그 공고를 확인한 너는 대출이나 일자리보다 더 시급한 게 뭔지 깨달았다. 너는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한 생각은 너무도 절실해서 서글프다 못해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인턴 기간을 마친 회사에서 밀려나고 오민정과도 헤어진 후였다. 한동안 인터넷만 뒤지며 지냈으면서도 너는 공고를 너무 늦게 발견했나 보았다. 가까운 상담소는 물론 연락해 본 모든 곳이 다 마감된 상태였으니까. 김영준 심리치료연구소, 마지막에 그 한군데만 빼놓고 말이었다.
‘그럼 그렇지. 이게 연구소라고?’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너는 돌아갈까 한숨을 쉬었다. 망설이다 노크하자 곧장 외침이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낡아빠진 상가의 복도에 걸맞게 연구소 내부도 허름했다. 정면에 창문이 있는 좁고 긴 원룸이었다. 맨 안쪽에 놓인 책상에 앉아 있던 김영준이 예의상 의자를 빼고 일어났다. 한쪽에 놓인 주황색 카우치가 눈에 띄었다. 눅눅한 느낌의 카펫을 밟고 들어간 너는 다소 긴장한 채로 그와 책상을 두고 마주 앉았다.
그는 평범한 아저씨 같았다. 그런 아저씨들을 보면 너는 아버지를 떠올리곤 했다. ‘김영준 소장’이라고 새겨진 명패에는 상담 심리학 박사과정 디플로마가 새겨져 있었고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고학력자인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