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계 6년 북경성 대폭발 비망록
내가 식자재를 훔치지나 않을까 걱정되었는지 몽둥이를 들고 지켜보던 그 오랑캐 앞에서 나는 진말(眞末: 밀가루)에 물을 타 반죽했다.
진말을 뿌려둔 목제 탁자 위에서 반죽을 잘 만든 다음,
그자에게 손짓 발짓까지 써가며 몽둥이를 빌렸다.
그자는 장검을 찼으니 몽둥이 좀 빌려줘도 별 일 없으리라 봤는지 순순히 빌려줬다.
몽둥이를 밀대로 써서 얇게 편 다음 식칼을 들어 가늘게 썰었다.
서로 달라붙지 않도록 진말을 묻히는 것까지 보면서
오랑캐는 “오호?” 소리를 내며 눈을 크게 뜨고 지켜봤다.
밀국수가 준비되었으니 육수와 고명도 준비하기 시작했다.
나는 사슴의 목에서 고기를 취한 다음,
한 입 크기로 썰면서 떼어놓았다.
파도 썰어놓고, 마늘도 식칼의 옆면으로 눌러 으깨놓았다.
오랑캐가 상국 사람인 머슴을 불러다 아궁이의 불을 살려둔 걸 확인하고
솥 안에 기름을 친 다음 사슴고기를 넣고 볶다가 파를 넣고 계속 볶았다.
오랑캐도 머슴도 고기 볶는 냄새에 취한 걸 보며 씩 웃어준 다음 솥에 물을 붓고 으깬 마늘도 넣었다.
간장을 넣고 간을 보며 수시로 국자를 휘저으며 끓이니 부엌 밖으로도 냄새가 나갔다.
여러 오랑캐들이 어린아이들처럼 호기심어린 표정을 지으며 부엌에 들어왔다.
꼬락서니가 잔칫집 노비들의 아이들 같아 우스웠다.
육수가 다 되었다 싶었을 때 밀국수를 물에 씻어 진말을 없앤 다음 넣고 함께 삶았다.
이렇게 하지 않고 삶으면 죽처럼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파 한 뿌리를 채 썰어 넣고 잠깐 끓여 마무리하니,
오랑캐들이 오지그릇을 하나씩 들고 줄을 서 있었다.
10여 명에게 배식하고 나니 칼국수가 다 떨어졌다.
제 몫을 기다리다 못 받은 오랑캐들이 붉으락푸르락 하더니
그중 누가 조선말로 “더 줘!”를 외쳤다.
이에 다른 오랑캐들도 “더 줘! 더 줘!”를 합창하니,
이미 다 먹은 놈들도 그리 외쳤다.
나는 살 길이 열렸다는 생각에 해가 질 때까지 계속 칼국수를 만들었다.
나는 눈치껏 사슴의 생고기와 생마늘, 육수를 먹어가며 일했다.
부엌에서 이렇듯 한참 소란이 나니까 아주 화려한 갑주를 차려입은 오랑캐 장수도 부엌을 찾았다.
오랑캐들이 그자를 보고 넙죽 엎드리기에 나도 칼국수를 끓이다 말고 넙죽 엎드렸다.
내가 살고 죽는 게 그자의 손에 달렸음을 짐작해서였다.
그자가 부하들에게서 보고를 받았는지 내게 뭐라 명했다.
통역이 “어서 새 국수를 끓여 저하께 올려라!”라고 하면서 상국(上國: 명나라)에서 만든 게 분명한 크고 아름다운 도자기 사발까지 들이밀었다.
그건 도대체 언제 가져온 건지 지금도 궁금하다.
나는 다른 오랑캐들에게 “조금만 더 끓인 다음 알아서 드시오!”라고 조선말로 일러둔 뒤,
새 솥으로 새 칼국수를 끓여내 그 도자기 사발에 담았다.
솥뚜껑을 뒤집어 번철로 써서 황·백 계란지단도 만들어내 올렸다.
그 뜨거운 사발을 통역이 무릎을 꿇고서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자
‘저하’라는 오랑캐는 선 채로 맛있게 먹었다.
이때 다른 자들은 그저 넙죽 엎드리고 있었는데, 긴장감이 흘렀다.
이 와중에 나는 마음을 달랠 겸해서 칼국수가 졸아들지 않도록 계속 솥에 물을 부어넣으며 저어댔다.
칼국수가 아니라 사슴고기 진말죽이 다 되었을 즈음에 ‘저하’가 식사를 마쳤다.
“앞으로 너는 저하와 휘하 군관들을 위해 고기국수와 고기죽을 만들어라!”
통역이 ‘저하’라는 자의 지시를 전달했다.
조선 땅에서 천하게 여겨지는 숙수의 일이 내 목숨을 구한 것이다.
이는 내가 마 대인을 만나 오랑캐 진영을 탈출해 상국에서 7년 가까이 살면서 재물을 모을 수 있게 해주었다.
경위는 다음과 같다.
오랑캐 군관들의 숙수 노릇을 한 지 1년이 다 되던 어느 늦겨울 저녁,
웬 미남 군관이 내 처소를 찾아왔다.
오랑캐들이 비역질(동성애)을 즐기는 걸 몇 번 목격했던 나는,
이자가 내 엉덩이를 노린 건가 싶어 가슴이 철렁했다.
겁에 질린 내 얼굴을 본 그자가 나를 안심시키더니 이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