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여름호 계간지 <사이펀> 게재
12시 10분에 여기로 모입시다
약속을 하고 우리는 헤어졌어
나도 헤어졌지
순간 어지러웠는데
오래 앉아 있다 일어날 때도 그랬어
땅 속 깊이 서 있던 무가 뽑힐 때처럼
눈이 부신다거나
목구멍에 얹힌
첫 공기의 비린내, 그런 기분 알잖아
가이드도 사라졌어
카멜색코트를 벗었던 것 같은데
저쪽일지 모르는데
카멜 냄새가 났어
쌍봉낙타가 걷기 시작해 속눈썹이 길었어 그 위에 누가 누워있더라 낯이 익었지 이름을 부르진 않았어 우리가 또 흩어질까 봐 계속 어지러웠지
가이드를 따라다닐 때는 공원출구가 어디인지 방금 전에 탄 버스가 무슨 색깔이었는지 ‘고맙습니다’를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몰라도
괜찮았는데
어디선가 풍경소리가 붐벼와 ‘소원의 종’앞에 선 커플은 여러 번 절을 했어 종이 울렸나 가이드는 아직 돌아오지 않고
학회는 언제 시작하나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어
까마귀가 머리 위를 맴돌아 이 새는 길조일까 흉조일까 생각하는데 또 다른 까마귀가 나를 기웃거리더니 저쪽으로 흩어지네
가만히 서 있었어
‘12시 10분’과 ‘여기’사이
가이드에게 잘 들키기 위해서 그랬어
중력은 내 몸무게를 나보다 더 오래 기억해
그 숫자만큼 나를 꼬옥 받쳐주고
나는 더 깊이 발을 집어넣었어
이곳은 어두워서
몰래 캐러멜을 녹일 수 있고
나를 기다리기에 참 좋은 곳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