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베팅 1>에서 이어집니다
그날 저녁, 치우와 지나는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
“오늘 왜 못 왔어?”
“갑자기 여동생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응급실에 갔었어요. 보호자가 나밖에 없거든요.”
“동생은 괜찮아?”
“며칠 입원해야 할 것 같아요.”
“천만다행이네.”
위로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곧 격앙되었다.
“근데 말이야, 맛데기장에서 금 사장을 만났어. 자기가 알려준 번호로 1억을 베팅했는데, 금 사장이 내 베팅액을 보고는 2억을 베팅해서 맞혔어.”
“배당은 어땠어요?”
치우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물었다.
“복식 3.3배라서 내가 딴 돈보다 금 사장이 두 배를 벌었어. 아, 약 올라! 그런데 더 열받는 건 뭔지 알아?” “뭔데요?”
“‘민 여사, 베팅은 나한테 한 수 배워야겠네’ 하면서 나를 놀리는 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10억을 베팅해서 금 사장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는 건데.”
“무척 아쉽네요. 근데 문제가 좀 생겼어요.”
“무슨 문제?”
그는 난처한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뭐냐고? 빨리 말해봐.”
“오는 길에 민수한테서 연락이 왔어요. 우리에게 소스를 주는 선배가 마사회에서 의심받는 것 같다고… 그래서 더 이상 소스를 주기 힘들 것 같다고 하네요.”
“그럼 어쩌지? 다음 경주에 왕창 베팅해서 금 사장에게 복수하려고 했는데… 소스비를 주면 어떨까? 부탁해볼 수 있을까?”
지나는 애원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제가 한 번만 더 소스를 달라고 졸라서, 마지막으로 주기로 했어요.”
“정말? 잘했어!”
치우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민 여사님, 선배에게 사례도 해야 하고… 이번이 끝이니 저도 베팅해서 돈을 좀 마련하려고 해요. 그러니 1억만 빌려주실 수 있어요?”
순간 지나는 갈등을 했지만, 만약 거절하면 그가 소스를 주지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어차피 1억 원은 다시 받을 것이고, 이 경주에서 크게 한탕을 노리고 있었기에 기꺼이 수락했다.
“민 여사님, 이 일은 금 사장에게 비밀입니다.”
“당연하지. 내가 미쳤어? 그 인간에게 말하게. 혹시 금 사장이 내 돈으로 경마하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닐 거예요. 금 사장도 그 정도 능력은 있잖아요. 민 여사님, 조만간 여사님들과 모임이 있다면서요?” “응. 근데 한 여사가 참석하면 안 가려고 해. 얼마나 시건방지게 굴는지 밥맛이 떨어져. 또 한 여사에게 지문이 닳도록 아첨하는 년들의 꼴을 보기 싫어서.”
지나는 얼마 전 계모임에서의 일을 이야기하며 분노를 터뜨렸다.
“한 여사가 나오더라도 모임에 가세요.”
“왜?”
“이런 말씀 드리기 뭐하지만, 저를 한 번 이용해서 그동안의 수모를 갚아보세요.”
“무슨 말이야?”
“민 여사님은 미모나 교양 등 모든 면에서 한 여사보다 뛰어나신데, 재력에서 조금 밀리잖아요.”
“바로 그거야. 그 모임의 멤버들은 모두 무식해서 사람의 가치를 오직 돈으로만 판단해. 자금줄이 아니었다면 벌써 탈퇴했을 거야. 아직은 그년들 돈을 굴리는 게 유리해서 참고 있는 거지. 만일 내가 한 여사보다 부자였다면 모임 회장 자리는 무조건 내 것이었을 거야.”
“어디서 만나는데요?”
“한정식집에서.”
“그러지 마시고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만나자고 해요. 거기서 저를 애인으로 소개하세요. 제가 계산을 하고 민 여사님의 체면도 세워 드릴게요.”
“맞아! 내가 그 생각을 진작 못했지? 그곳에서 각자의 파트너를 부르는 거야. 내가 몇몇은 봤는데, 그들에 비하면 자기는 황태자라고 할 수 있어. 이번 기회에 한 여사에게 돈으로도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걸 확실히 보여주겠어.”
그녀의 얼굴에 승자의 기쁨이 번졌다.
“자기야, 정말 고마워. 이렇게까지 내 자존심을 살려주려고 희생양이 되어주다니. 그럼 나는 치우 씨에게 어떻게 보답해야 할까?”
“지금 제 사업에 투자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자금이 부족하면 언제든지 말해. 금 사장 쪽에 갈 돈이라도 먼저 줄게. 글구 그거 오래 끌 필요 있어? 당장 연락해서 내일 저녁에 한턱 쏜다고 하지. 공짜라면 양잿물이라도 마시는 인간들이니 맨발로 뛰쳐나올 거야. 근데 자기 스케줄은 괜찮아?”
“있긴 한데… 그 전에 일을 끝내면 돼요.”
지나는 여기저기 전화하느라 바빴다.
다음 날 저녁, 호텔 로비에 들어선 치우는 화장실에서 옷매무새와 머리 손질을 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만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지하 나이트클럽으로 향했다. 그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저번이 맛데기 작업이었다면, 오늘은 파멸 작업의 서막이다.'
“어, 형님 아니세요? 오랜만이에요. 혼자세요?”
가슴에 홍길동 배지를 단 웨이터가 그를 보자 반갑게 인사했다.
“너, 기억력이 좋구나. 아직도 날 기억하고 있네.”
“손님의 몽타주를 스캔하는 게 제 밥줄이잖아요. 그 사건 이후로 형님의 카리스마는 저의 우상이 되었어요.” “인마, 입발림 소리 그만해라.”
오래 전, 치우는 금 사장 사무실 직원들과 회식차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그때 세두의 깐죽거림으로 옆 테이블과 시비가 붙었지만, 그가 기선을 제압하여 싸움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당시 담당 웨이터였던 홍길동은 그의 행동에 감명을 받아 졸졸 따라다녔다. 치우가 명함을 준 이후로 지금도 안부 문자가 꾸준히 오고 있다. 물론 웨이터의 영업 중 하나겠지만, 그 정성은 갸륵했다.
“길동아, 오늘은 나 모른 척해라. 다음에 오면 꼭 너를 부를게. 알았지?”
“예,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웨이터라는 직업은 하루에도 수십 명의 술에 취한 손님들의 요구를 맞춰야 한다. 그래서 이들은 눈치가 몸에 밴 프로이다. 치우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괜히 아는 척했다가 지나의 일행에게 클럽 단골 손님으로 오해받을 수 있어서였다.
VIP 룸에서는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며 술을 즐기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고급 양주와 다양한 안주가 가득했다. 계모임의 모든 회원이 모였고, 한 여자만 파트너가 없었다. 이 그룹은 소비가 크기에 VVIP로 대접 받았다.벌써 클럽의 상무가 인사차 다녀갔고 두 명의 고정 웨이터가 풀 서빙을 하고 있었다.
“민 여사, 웬일이야? 곗날도 아닌데 우리 파트너까지 초대해서 한턱 쏘시다니.”
“그러게. 혹시 로또라도 당첨된 거야?”
“로또 그거 맞아도 몇 푼 안 돼. 예전에는 몇백 억이 나왔지만, 요즘은 수십 억 정도에 불과해.”
여자들은 지나의 집합에 대해 궁금해하며 한마디씩 했다.
“로또는 무슨, 그냥 얼굴 보고 싶어서 모이자고 한 거야.”
한 여사는 여자들의 농담에 끼지 않고 자신의 파트너와 속삭였다. 지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복수의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