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에게는 전화를 했어야 했다

내가 너무 고지식한 건가? 나, 꼰대인가?

by 춘림

저녁을 먹고 산책을 나갔다.

7시가 넘었는데도 여전히 밝았다.

30분쯤 걸었을 뿐인데 온몸이 땀에 젖었다.

그때 휴대폰 벨이 울렸다. 큰언니였다.

언니가 다소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너 왜 카톡 안 봐? 창민이 아들 낳았대.”


창민(가명), 우리 집안의 맏손주. 큰오빠의 큰아들이다.

그런데 창민이의 출산 소식을 전한 사람은

창민 본인도, 그의 부모도 아니었다.

그 대신 고모인 큰언니가 그 소식을 나에게 전하고 있었다.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다.

새언니는 며느리에게 ‘거리두기’를 통보받은 상태였다.

그녀가 얼마나 못된 시어머니였는지는 모르지만,

아들로부터도 외면받고 있었다.

큰조카는 오직 큰언니, 큰형부와만 교류하고 있었다.

큰언니는 평소 큰조카 부부를 잘 챙겼고, 품었다.


어쨌든 창민이는 내게도 조카였고, 엄마에게는 손자였다.

나는 언니에게 반사적으로 말했다.

“그럼 할머니한테 전화드리라고 해.”

언니가 말했다.

“걔가 지금 그럴 경황이 있겠냐. 제 엄마한테도 문자만 했나 보던데,

무슨 할머니한테 전화를 하겠어.”

나는 생각이 달랐다.

아이가 태어났다면, 할머니에게도

‘우리 아이가 태어났어요’라고 직접 소식을 전하는 게

가족이고, 도리라고 생각했다.

제 엄마와는 갈등이 있어서 연락을 끊다시피 했다 해도

할머니와는, 내 엄마와는 아무 일도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도 창민이는 아무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나는 언니와의 통화를 불편한 마음으로 마무리했다.

언니는 조카의 편에 서 있었고, 나는 엄마의 편에 서 있었으니까.


나는 지금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

한때 엄마는 큰오빠, 새언니와 살았다.

그러다 고부 갈등이 생겨 따로 살게 되었고,

몇 해 지나 나와 함께 살게 되었다.

지금은 엄마와 새언니 사이가 나쁘지 않다.

나쁜 건 이제 새언니와 그녀의 며느리 사이다.


집에 돌아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창민이 아들 낳은 거 알아?”

엄마는 전혀 모르는 얼굴로 되물었다.

“애를 낳아? 언제?”

“오늘.”

엄마의 표정이 곧 싸늘해졌다.

“누가 나한테 전화해줘서 알아? 모르지.”

짧은 말이었지만 그 안엔 묵직한 감정이 실려 있었다.

내 마음도 같이 묵직해졌다.

엄마가 서운해하는 걸 보니, 나도 덩달아 서운해졌다.

그 서운함이 내 감정인지, 엄마의 감정인지 경계가 모호했다.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한집에 살면, 그런 일이 잦다.

엄마가 아무 말 없어도 나는 엄마의 감정을 읽는다.

한 공간에서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가끔 다투기도 하는

그 일상의 틈에서 나는 엄마의 표정 변화에 민감해지고,

말보다 조용한 반응에 더 예민해진다.

엄마와 함께 살지 않는 다른 가족들은 이런 걸 모른다.

같이 살지 않으면, 모를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것이 억울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서운함은 지금 내 눈에만 보인다.

집 안에서는 그 감정이 너무 선명하게, 너무 무겁게 다가온다.

한편으론, 이게 그렇게 무거울 일인가 싶은 마음도 든다.

내가 너무 고지식한 걸까? 스스로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전화 한 통이면 되는 일이 있다.

그 전화 한 통으로 기울어진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는 관계도 있다.

그게 예의다. 그게 어른을 향한 최소한의 존중이다.

엄마와 함께 사는 나는 엄마의 기쁨과 상처를 더 자주, 더 가까이서 마주한다.

내가 챙기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 채 지나갈 감정들이 있다.

내가 눈치 채지 않으면, 아무도 읽어주지 않을 마음들이 있다.

나는 또 자문한다.

내가 너무 고지식한 걸까? 나, 꼰대인가?

그래도 괜찮다.

그 고지식함으로 나는 엄마의 마음 한쪽을 지켜주고, 지탱해줄 생각이다.



※ 덧붙임

다음날, 큰조카가 엄마에게 전화해 경황이 없어 전화가 늦어졌다며 출산 소식을 전했다.

엄마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축하한다! 아빠된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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