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자고 TV는 안 잔다

TV를 끄면 엄마가 깬다

by 춘림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각,

엄마 방에서 계속 TV 소리가 들린다.

슬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가 보면

엄마는 잠들어 있고, 화면 속에선 죄인이 곤장을 맞으며 울부짖고 있다.


잠들기 전 보시는 게

역사 재연물인 천일야사나 무속인 프로,

미제 살인사건 같은 걸 다루는 시사프로이다 보니

엄마 방에 TV 끄러 갔다가

나는 종종 험한 장면과 맞닥뜨린다.

‘저런 걸 켜놓고 잠이 와?’ 하고 보면

엄마는 쿨쿨 잘도 주무시고 계신다.

그래도 행여 울 엄마 꿈자리 사나울까

나는 엄마 머리맡에 있는 리모컨을 들고 TV를 끈다.

그런데 그 순간— “놔둬” 하는 소리가 들린다.

보면, 엄마가 언제 잠들었냐는 듯 눈을 뜨고 TV를 보고 계신다.

분명 주무시고 계셨는데 TV 끄는 걸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눈을 뜨는 엄마에

깜짝 놀란 게 벌써 몇 번째인지….


“주무실 거면 TV 끄라고 했잖아.”

이 말도 몇 번째인지 모르지만

엄마는 “알았어” 하고도 말뿐이었다.

나는 그 속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예전엔 외로워서 그러시는 줄 알았다.

혼자 사시던 시절, 집안이 절간처럼 너무 조용해서 그랬을 거라고.

하지만 이젠 딸과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일까. 그냥… 습관의 무서움인가.


그렇게 의문을 갖고 있던 어느 날,

이에 대해 쓴 한 칼럼니스트의 글을 봤다.

“TV 소리는 외로움을 막아주는 심리적 방어막이자, 익숙한 백색소음이다.”

“혼자 있는 느낌을 줄이고, 무의식 속에서 ‘나는 아직 연결돼 있다’는 감각을 준다.”


적막을 밀어내고, 세상과 연결돼 있다는 감각을 얻기 위해서라 해도

나는 또 리모컨을 든다.

엄마의 수면 질이 걱정되고, 치매 예방에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

소란한 영상 대신 조용한 어둠이 엄마 곁에 머물러 엄마가 푹 주무셨으면 해서.

마치 아이들 스마트폰 오래 못 보게 하는 엄마의 심정으로.

나는 엄마가 아니지만 이럴 땐 엄마의 마음이 된다.


TV는 꺼졌고, 평화가 찾아왔다.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5분 뒤, 다시 들린다.

“그리하여 억울한 누명을 쓴 죄인 김말똥은—”

… 졌다.

오늘 밤도, 엄마의 심야방송은 계속된다.




덧붙이는 글...

언니한테 엄마가 보는 심야프로에 대해 얘기했더니

엄마가 온종일 드라마를 10편도 넘게 보시다가(재방 포함)

밤엔 진짜 볼 게 없어서 더 자극적인 걸 찾는 것 같다며 웃는다.

불륜도 식상하고, 친자 확인이니 유전자 검사도 지겹고,

그래서 결국엔 무속 방송, 미제사건, 피 튀기는 사극 재연극장까지 간다는 거다.

듣고 보니, 나도 집밥에 질릴 때 마라탕을 찾는 입장이라 괜히 설득됐다.

엄마의 심야 방송 취향은 어쩌면 ‘마라탕의 법칙’ 같은 것일지도.

비슷한 이야기들에 물린 하루 끝에 얼얼한 자극으로 정신을 씻어내는 밤.

곤장을 맞으며 울부짖는 김말똥의 사연이

하루를 마감하는 가장 확실한 백색소음일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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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소음

#생활관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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