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언 조카 구하기

미친 폭우 속, 세 자매가 동시에 움직였다

by 춘림

2025년 7월 17일,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진 날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밖에 있다가 서둘러 귀가할 그때,

나는 집에 있다가 밖으로 나갔다.



하늘은 양동이로 들이붓듯 비를 퍼붓고 있었고, 도로 곳곳은 통제됐다.

그날 오후, 둘째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고2 조카 장우(가명: 둘째언니 막내아들)가 하교하던 중, 도로통제로 버스에서 내려졌단다.

운전기사가 “더 이상 갈 수 없다”며 전원 하차시켰고,

지금 ○○정류장에 서 있는데 택시도 못 잡는 상황이라고,

혹시 내가 조카를 데리러 갈 수 있겠냐고 묻는 전화였다.


조카가 내린 곳은 둘째언니네보단 우리 집과 훨씬 가까웠다.

하지만 문제는…

나는 차가 없었고, 평소에도 택시가 잘 잡히지 않는 동네에 살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폭우, 물난리, 도로통제 상황.

나갔다간 나까지 구조 대상이 될지도 몰랐다.

그래서 둘째언니에게 말했다.

“장우도 택시 못 잡고 있다면서 여기라고 택시가 잡히겠냐?

잡혀도 여기 택시 금방 오는 데 아니야.”

“그럼... 어떡해?”

언니의 말에서 애타는 심정이 묻어났다.

나는 큰언니한테 한번 전화해 보라고 했다.

하지만 큰언니 쪽도 도로가 막힌 모양이었다.

정말 나밖에 없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택시를 호출해 봤다.

그런데 웬걸, ‘곧 도착’이 떴다.

평소에도 잘 안 잡히던 택시가, 이 폭우 속에 바로 오다니.

조카를 구하러 갈 사람은 너뿐이라는 신의 계시처럼 여겨졌다.

택시가 바로 올 줄 몰라서 나갈 차비를 충분히 하지 못하고 있던 터라

휴대폰 챙기고, 카드 챙기고, 같이 가려는 반려견 봄이를 떼어놓는 일을

거의 30초 만에 해치우고 튕겨나가듯 집을 나갔다.

그래도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가는 데까지 시간이 좀 걸려

택시기사님이 좀 기다리셨는데, 기사님은 또 왜 이리 친절하신 분인 건지.

정말 드물게 친절한 택시기사님을 만났다.

하지만 조카를 데리러 가는 길은 전혀 친절하지 않았다.

택시 바퀴 아래가 물에 잠긴 게 느껴지는 것이 빗길 위가 아니라

그야말로 물속을 달리고 있었다.

지나는 길에 본 동네 하천은 거의 다리의 목까지 물이 차올라 있었다.

갑자기 하천물이 범람에 어딘가로 떠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공포가 살짝 일기도 했다.

나는 조심스레 기사님께 말했다.

“조카를 픽업해서, 다시 이쪽으로 와야 하는데... 올 수 있을까요?”

그러자 기사님이 장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 지금 하천물이 계속 불어나고 있어서 돌아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저도 집엘 가야 하는데 갈 수 있을는지...”

순간, 픽업 후 귀가 불가 시나리오가 머리를 스쳤다.

조카와 나란히 장대비를 뚫고 도보 귀가?

그건 극한 체험 중에서도 극한 체험일 텐데...

그런 상상을 하던 찰나, 큰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어디야?”

“지금 장우 데리러 가고 있는데 거의 다 와 가.”

“나도 거의 다 와 가는데?”

“내가 데리러 간댔잖아, 뭐 하러 왔어?”

“아 어딘지나 말해.”

큰언니가 왔으니, 빗속을 걸어야 할 걱정은 줄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조카를 구한 공을 큰언니와 나눠 갖게 된 것만 같아 아쉬웠다.

이런 구조작전은 단독 수행일 때 비로소 영웅서사가 되는데 말이다.


거의 다 왔다곤 했지만(실제로도 그랬지만) 그 앞 정체된 도로에서

멈췄다 달리기를 반복하고 잘못 유턴해 뒷길로 접어들었다가 다시 대로변에 나오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조카를 만나 택시에 태웠다.

조카는 버스정류장에서 두 시간을 서 있었다고 했다.

지쳐 보였고, 살짝 떨기도 했다.

나는 조카를 태우고 돌아오는 길에 농담처럼 말했다.

“이거 뭐, 라이언 일병 구하기도 아니고.”

택시기사님께는 언니가 데리러 와서 다시 안 돌아가셔도 되겠다고,

저기 앞에서 내려주시면 되겠다고 했더니 좋아하시는 게 아니고 좀 아쉬워하시는 것 같았다.

그건 택시기사님 입장에서도 영웅서사의 미완일 테니까.


택시에서 내려 큰언니차로 환승해 집으로 향하며 둘째언니에게 전화했다.

“장우 만났어. 장우랑 큰언니 차 타고 집에 갈 거니까 걱정하지 마.”

그제야 둘째언니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여기도 막 도로통제 풀려서 나도 금방 갈 수 있을 거 같아. 기다려.”

그러니까 이게 무슨 상황이냐면, 조카 데리러 세 방향에서 세 자매가 동시에 출동한 거였고,

구조는 이미 완료됐는데, 증원 병력이 계속 도착 중이었던 거다.


큰언니가 행여라도 도로통제가 될법한 큰길이 아닌

뒷길로, 그러면서 비교적 안전한 길로 달려

조카와 나는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그 뒤 10분도 안 돼 둘째언니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리고 마치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하듯, 아들과 포옹했다.

나는 그날의 구조작전을 이렇게 정리했다.

“세 명이나 출동한 건 공권력(?) 낭비였어.”


구조는 과잉이었고, 성과는 분산됐지만

그래도 그날, 뿌듯함이 남았다.

그날의 구조는 매우 성공적이었으니까.

TV에서는 물에 잠긴 도로상황을 속보로 내보내고 있었고, 재난문자는 계속 울리고 있었다.

7월 17일 그날은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던 날이 아닌

장우를 구했던 날로 기억될듯하다.

나는 임무를 완수했고 그 공은 모두에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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