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색무취 Sep 30. 2024

11-1. 쉼표

어저께 Y네에서 진한 시간을 보내다가 온 우리 부녀는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났다. 딸에게 점심 먹고 아내가 있는 병원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딸이 시원찮게 대답한 것이 못내 불만스러웠지만, 원래도 시원시원하게 응답하는 스타일은 아니라서 그러려니 하고 둘이 소파에 드러누워서 넷플릭스를 함께 보고 있었다. 혼자 속상해하고 있을 엄마랑 같이 점심 먹자고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빠, 오늘은 병원에 가면 엄마 만날 수 있어?”

“아니, 오늘도 가서 밖에서 엄마 응원해 주는 거지.”

“그럼, 안 갈래.”


딸의 갑작스러운 불참 선언에 적잖이 당황한 나는 황급히 되물었다.


“왜? 그래도 엄마한테 가서 응원해 주면 좋지 않을까?”

“어차피 가도 엄마 못 만나잖아. 그냥 안 갈래.”


딸의 의사 표현이 이토록 확실하니 나도 할 말이 없었다. 따져보면 딸의 말이 맞았다. 어차피 병원에 가더라도 지난주에 그랬듯 중환자실 앞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오는 것 이외에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냥 덩그러니 집에 있자니 아내에게 괜히 죄책감이 들었던 것 같다. 그저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딸을 데리고 병원을 가는 것은 그저 내 불안함을 잠재우고자 하는 욕구에서 발현된 생각일지도 모른다.


나는 대학생 때, 미국 시트콤 프렌즈(Friends)를 매우 재밌게 봤다. 우리 세대의 대표적인 영어 회화 교재이자 미드(미국 드라마)로 많은 인기를 끌었던 이 시트콤은 뉴욕에 거주하는 6명의 청년이 성장하는 모습을 유머러스하고 익살스럽게 담았내며 세계적인 열풍을 만들어냈다. 나는 총 10개의 시즌으로 구성된 프렌즈를 약 3~4회 돌려 봤을 정도로 열렬한 애청자였는데, 수많은 에피소드 중에서도 인상적으로 본 에피소드 중 하나가 ‘The One Where Phoebe Hates PBS’  (Season 5, Episode 4)이다. 프렌즈도 결국 러브 라인의 압박을 피해 갈 수 없었는지, 2개의 커플을 만들어냈고, 내부자 커플이 되지 못한 Phoebe와 Joey가 곁다리 스토리로 호흡을 맞추는 경우가 많았다.


Phoebe를 연기했던 Lisa Kudrow가 실제로 임신하면서 극 중에서는 Phoebe가 남동생네 세쌍둥이의 대리모를 자청하여 임신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녹여낸다. 엉뚱하면서도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Phoebe를 고려하면 매우 적절한 연출이었다. 한편, 극 중에서 무명 연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Joey가 한 방송사의 자선 모금 운동에 출연한다고 하자 Phoebe는 TV 출연이 봉사 활동이 아닌 본인을 알리기 위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선행이 아닌 이기적인 행위라고 비난했다. 그러자, Joey는 Phoebe가 남동생을 위해서 대리모를 한 것 또한 이기적이라고 하면서 세상에 이기적이지 않은 선행은 없다고 주장했다. 즉, 본인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않는 선행은 없다는 뜻이다. Phoebe Joey 말이 틀렸다고 증명하려고 무던히 노력하지만, 결국 반례를 찾지 못한다. 억지로 선행을 베풀기도 하고 심지어 벌에게 억지로 쏘이기도 하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Phoebe 본인도 뿌듯함이나 기쁨을 느끼거나 상대방에게 예상치 못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시리즈 통틀어서 Joey의 말이 맞는 몇 안 되는 경우를 증명해 주고 만다.


이렇듯, 우리가 남들을 위해서 한다고 여겼던 일들은 결국 내 기분에 큰 영향을 미친다. 다른 사람이 나의 도움으로 기뻐했을 수도 있고, 내가 베푼 결과로 누군가 굶었을 한 끼를 배불리 채웠을 수도 있다. 하지만, Phoebe가 증명해 주듯 사람들은 선행뿐만 아니라 어떠한 행동을 하든, 자기의 욕구 충족이 반드시 수반된다. 행위자가 자신의 욕구가 투영되었음을 어느 정도 인정하냐에 따라 그 행위의 정당성과 자기 설득의 수준이 결정될 뿐이다. 오히려 자신의 욕구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보다 더 고통스러운 활동이 될 확률이 높다.


가족이나 지인에게 부탁을 받으면, 일반적으로 승낙 또는 거절이라는 두 가지 선택 사항이 있다. 물론, 부탁을 변형한 제안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와 같은 대안들도 궁극적인 승낙 또는 거절이라고 볼 수 있다. 부탁을 승낙한다고 하면, 그 사람을 위하는 마음에서 승낙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결국 나를 위하는 마음도 충분하게 포함되어 있다. 부탁한 사람이 내게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히 들어주는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내 마음속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행위이다. 부탁한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거나 나쁜 사람으로 보이기 싫거나, 곤경에서 빠져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나의 불안감을 해소하거나, 상대방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같이 기뻐할 수 있다. 이 외에도 마음속의 수많은 욕구가 해소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결국, 내가 어떤 행위를 함으로써 상대방의 변화가 내게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궁극적으로 그 변화가 내게도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판단했기 때문에 나도 마음이 동하여 움직이는 것이다.


거절하는 상황 또한 해소되는 욕구의 종류가 다를 뿐, 크게 다르지 않다. 부탁하는 사람의 평소 모습이나 태도가 내게 좋게 보이지 않아서 돕고 싶은 마음이 크게 일지 않을 수도 있고, 그런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게 되었을 때 내게 긍정적으로 미칠 영향보다 도와주면서 내가 얻게 될 걱정이나 스트레스가 늘어날 것 같으면 결국 거절하게 된다. 거절했을 때의 불편함쯤은 감당할 수 있으면 내릴 수 있는 결정이고, 그렇지 못하면 내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 곤란한 부탁도 들어줄 것이다. 이 또한, 부탁한 사람과는 상관없는 나의 욕구를 기저로 뒀을 것이지만 우리는 흔히 남들에게 귀인하곤 한다.


우리가 내리는 평소의 모든 결정이 우리 내면의 욕구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면 세상의 많은 일들이 괴롭고 억울할 것이다. 내 주위에서 발생하는 일들이 다 정당하거나 모두 내 탓이라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그 일들은 결국 변수가 아닌 상수다. 물론, 내가 예전에 다르게 행동해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거나 방지할 수 있었다면 매우 좋았겠지만, 그것은 과거의 일일 뿐이고 사건이 벌어지고 난 후에 걱정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 내가 미리 공부해서 시험을 더욱 착실하게 준비하거나, 팀장님이 나를 자리로 불러서 잔소리하기 전에 클라이언트와 미팅도 하고 자료 조사나 준비를 해뒀다면 얼마나 좋았겠냐만, 내가 지금 당장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지금 당장의 내 생각과 행동밖에 없다.


남들이 내게 잘못을 저질렀거나 나를 이해해 주지 못한다고 원망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아무리 내가 그들에게 내 상황을 소상히 설명해 준다 한들 상대방도 본인 입장을 먼저 생각할 것이고, 이 또한 그들의 내면의 욕구에서 기반을 둔 말과 행동들로 귀결된다. 내 입장을 가장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기쁨, 행복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들의 근원은 나 자신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면서 슬픔, 원망,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의 뿌리는 외부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내가 나를 탓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지만, 그렇게 했을 때 비로소 자기반성과 극복이 가능하다. 내가 다른 사람을 바꿀 수 없지만 나 자신과 대화할 때는 타협과 논의의 여지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나 화법’을 쓰라고 한다. 남들에게 뭔가를 요구할 때, 내가 느끼는 감정을 얘기하면 상대방도 공격받더라도 직접적인 겨냥이 아니기 때문에 반박하기 힘들고, 내 감정들은 본인들 영역 밖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수긍하는 척이라도 한다. 나도 이런 경우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어 표현 중의 하나를 항상 떠올리려고 한다. Control the controllables.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은 신경 쓰지 말자.


내가 딸을 데리고 병원에 가고 싶었던 것은 결국 아내에게 조금이라도 덜 미안해지고 딸에게 최대한 엄마의 가까이 갔다는 흉내라도 내고 싶은 나의 욕구에서 비롯된 제안이었다. 아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내가 직접 한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불편함과 죄책감에서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특히 주말에 아내의 면회를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병원에 가지 않는 것은 너무나도 꺼림칙한 일이었다. 굳이 중환자실 앞에 앉아서 죽치고 있다가 간호사들에게 아내의 상태를 물어보는 관심 많은 남편 흉내라도 내면서 내 역할을 어느 정도 했다는 위안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병원에 가자고 딸에게 제안한 것은 나의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았고, 가족들에게 약간의 억지를 부려 가면서 이기적으로 마음이 편해지고 싶었던 나의 욕심이었다. 나의 이기심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딸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게 된 그 순간, 나는 병원에 가는 것을 포기했다. 중환자실에 전화를 걸어서 아내의 상태를 확인하면서 보호자로서 최소한의 역할을 충족하는 것으로 내 임무를 완수한 것으로 간주하기로 했다. 그리고, 오늘 하루는 딸과 나머지 가족들에게 집중하는 것으로 미션을 수정했다.


Friends (Season 5, Episode 4 - The One Where Phoebe Hates PBS)

https://youtu.be/Yza83MklQV0?si=GUJ5i1o-bC1dgl1-

이전 02화 10-2. 불편한 진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