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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색무취 Oct 03. 2024

11-2. 쉼표

수정된 계획에 따라 병원에 조심스레 전화를 걸어봤다. 이번 주에 여러 차례 전화 걸었던 중환자실 직통 번호는 저장하지 않았기에 휴대폰에 G병원 중환자실이라는 글자 대신 숫자만이 나열됐다. 아내가 곧 나올 거라는 허황한 믿음이 바탕이 됐는지, 결코 저장하고 싶지 않은 전화번호였다. 하지만, 번호를 내가 직접 저장하지 않았다고 해서 머릿속에 저장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SK텔레콤에서 제공하는 발신번호표시 서비스 덕분에 내가 기억하지 않으려고 해도 전화가 오면 번호의 주인이 G병원 중환자실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딸의 침대 위에 앉아서 걸었던 전화는 매우 간단하게 종료됐다. 아내의 상태를 물었더니, 큰 변화는 없지만 환자가 의사 표현을 하려고 노력한다고 했고, 내일 면회 올 때 물티슈를 한 팩 사달라고 했다. 그들에게는 아내의 상태가 물티슈 한 팩과 비슷한 무게를 갖는 것인가. 간호사가 말한 ‘의사 표현’이라는 말이 무척 두루뭉술하고 모호했다. 스스로와의 대화가 시작됐다.


‘며칠 전에 갔을 때 간호사가 아내의 얼굴에 최대한 가까이 붙어서 큰 소리로 부르면 옅은 신음 정도를 낼 수 있는데, 이 또한 의사 표현으로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금요일에 본 모습도 있고, 바닥은 확인했다고 할 수 있는 걸까?’

‘그래도 아직 인공호흡기를 달아야 하는 상황은 오지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마음속의 대화가 끝나갈 때쯤 현실의 묠니르가 나의 뒤통수를 강하게 때린다.


“아빠, 배고파!”


그렇다. 환자가 우리의 곁을 떠나 고생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남은 가족들은 각자의 기본권을 영위해야 했다. 하루 종일 환자 생각에 괴로워하기에는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나는 아내의 보호자가 됐지만, 동시에 딸의 아빠이자 보호자이기도 했다. 더 나아가 우리 집 고양이들의 보호자이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담비는 몇 달 전에 앓았던 항문낭염의 증상 중 하나인 똥스키(고양이 항문 주위의 항문낭에 염증이 생겨서 엉덩이를 스키 타듯 끄는 현상)를 지난주부터 시전하고 있었다. 역시 일복 있는 사람에게 일이 찾아오는 모양이다. 오늘 시간 여유가 좀 생겼으니, 동물병원에나 다녀오기로 했다. 딸과 점심을 먹은 후에 엄마한테 전화해서 동물병원에 다녀올 동안에 딸을 좀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차피 나와 딸에 대한 걱정이 가득한 우리 엄마는 저녁에 와서 저녁밥도 해주고 딸의 이번 주 유치원 일정 준비도 할 거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차라리 엄마에게 명분을 만들어 주기로 하면서 도움을 요청했다. 오후에 엄마는 집에 와서 나랑 바통 터치를 했고, 나는 담비를 데리고 동물병원으로 향했다. 여전히 누군가의 보호자로 있긴 했지만, 병원에 담비를 맡기고 대기실에서 기다리면서 오랜만에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대기실 의자에 등을 기댄 채로 최근에 다시 보기 시작한 스타크래프트 shorts들을 느긋하게 감상했다.


아내가 입원하고 나서 소비하는 유튜브 콘텐츠의 종류가 조금 바뀌었다. 원래는 박진감 넘치고 쉴 틈이 없는 스포츠 콘텐츠들을 많이 봤다면, 이제는 별생각 없이 멍하게 볼 수 있는 콘텐츠들을 추구하게 됐다. 한동안 안 보다가 다시 보게 되거나 새롭게 보게 된 채널이 두 개 있는데,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다루는 채널과 미국 카지노에서 슬롯머신을 하는 모습을 거의 1시간씩 보여주는 채널이었다. 둘의 공통점을 꼽자면 영상의 대부분이 반복적인 행위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10~15분에 한 번씩 클라이맥스와 같은 흥미진진한 대목들이 3~5분 정도 있다. 매 경기 유사한 과정의 빌드업을 하다가 경기 막판에 재미있게 일반인들을 학살하는 스타크래프트 채널이나 똑같은 슬롯머신 화면에서 주야장천 꽝만 나오다가 이따금 보너스 경기가 터질 때 귀여운 아저씨 도박꾼들끼리 환호성을 지르는 슬롯머신 채널을 보고 있으면, 굳이 집중하지 않다가 중요한 장면만 살짝 보면 돼서 멍 때리면서 즐기기에 제격이었다. 평소 나의 성격과 성향도 반영됐겠지만, 높은 집중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나는 장시간 방영되는 콘텐츠들을 더욱더 선호하게 됐다. 원래 같으면 10~20분 길이의 영상들을 주로 봤는데, 이제는 1시간가량 되는 영상 하나를 백색소음처럼 켜놓고 휴식을 취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평일에 이렇게 생각 없이 보다가 보면 어느덧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는 게 감사했다.


밤에 엄마를 집에 보내고 딸을 재우고 나면 집안이 고요하기만 하니 이런 소소한 자극들도 고맙게 느껴졌다. 소파에 앉아서 멍하니 보고 있으면 최애 주인을 잃은 맥스가 내 곁을 차지하고 앉는다. D와 M은 각각 암컷과 수컷인데, 가르친 적도 없는데 희한하게 이성의 주인에게 더 많은 애착을 가졌다. 원래는 딸이 잠들고 난 후에 조용해지면 M은 아내에게 다가가고 D는 내 곁을 슬며시 파고들었다. 하지만, 아내가 없어지고 나니 이들의 역학 관계도 절묘하게 균형을 잃었다. 수컷인 M의 몸무게가 암컷인 D의 2배가량 나가다 보니, 자연스레 둘의 서열에서 M이 우위를 점했다. 원래는 일대일 대응이었던 고양이와 어른 인간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M에게 우선 선택권이 돌아갔고, M이 원할 때마다 항상 나를 찾았다. M이 내 옆에 앉아 있으면 원래 내 곁의 주인이었던 D는 먼발치에서 바라볼 뿐이었다. 아내가 없으니 이처럼 우리 가족에는 크고 작은 변화들이 가득했다.


동물병원에서 D의 항문낭 추출을 완료하고 집에 귀가하니 잠시 멀리 할 수 있었던 현실을 맞닥뜨리게 됐다. 엄마는 우리의 저녁상을 준비하고 있었고, 딸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엄마, 딸과 셋이 저녁도 함께 먹고, 내일부터 또 일주일간 유치원과 각종 학원에 가야 할 딸을 위한 준비도 함께하면서 우리만의 주말을 마무리했다. 원래라면 아내에게 훨씬 의존적이었던 딸이었는데 이제는 부쩍 내게 안기면서 달라붙어 있었다. 아직은 도움이 필요할 때 아내가 없는데도 ‘엄마!’라는 짧은 외침이 입에 붙은 딸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기도 하지만, 잔인하게도 딸에게는 대안이 없다. 부모의 반이 사라졌으니 나머지 반에 들러붙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선택권 없이 시작된다. 부모가 자식을 갖는 선택을 할 수 있지만, 입양하지 않는 이상 어떤 아이를 만나게 될지는 정할 수 없다. 그러니 임신하고 나면 초음파 사진만 계속 들여다보면서 내 자식은 어떻게 생겼을지 하는 호기심에 사로잡힌다. 일반적으로 누가 시키지 않아도 부모는 자식을 사랑한다. 다만 모든 부모가 각자의 자식을 사랑하는 방식이 크게 다를 뿐이다. 직접 보고 들은 것들에 대해서만 꿈을 꿀 수 있듯이, 모두가 부모에게서 받은 사랑이 가장 중요한 참고 문헌이 된다. 어떤 사람들은 본인이 부모로부터 받은 대접을 사랑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것은 내가 부모를 선택하지 못하는 것에 따른 운명이라고 여기고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 편할지도 모른다.


가족원 중에서 우리가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배우자이다. 심지어 요즘은 배우자 선택의 폭을 늘려달라고 아우성이지 않은가. 정략결혼도 어찌 보면 다른 선택의 산물일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이 정해준 배우자를 받아들이는 것은 순응하기로 한 선택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부모나 다른 사람들이 억지로 정해준 것이 결코 정당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발버둥 치기 힘든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아무런 외부적 저항 없이 승낙한 것도 결국 내 선택이다. 계속 남 탓을 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다. 결혼을 결심하고 여생을 함께하자는 제안을 한 것에 대한 시험이 이런 형태로 제시된 걸까. 9년 전에 아내와 함께 가족을 이루기로 약속했으니 그 가족을 유지하는 것 또한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분명히 우리 결혼식의 주례에서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니 누가 배우자와 자식이 함께 물에 빠져 있으면 누구를 구할 거냐고 질문하면 지체 없이 내가 선택한 사람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고 대답해야 한다. 미리 자녀에게 수영을 가르치던가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 그를 구해주기 위해서 뛰어들고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그리고 분명 둘 다 같이 구할 방법도 있을 테니 항상 침착하자.



https://youtube.com/@altubetv?si=rm_0RArbZ-wfZseP

https://youtube.com/@vegasmatt?si=b9xUHqEdLgi8bjg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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