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되니 G병원 중환자실 전화번호로 휴대폰에 전화가 오면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아내를 만난 지 72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인 오전 10시 34분에 아무렇지 않다는 듯 휴대폰은 중환자실에서 전화가 왔음을 알려줬다. 이미 출근했던 나는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없도록 회사의 작은 회의실에서 전화를 받기 위해 종종걸음으로 이동했다. 회의실로 가는 그 짧은 찰나에도 별생각이 다 들었다. 먼저 전화하는 경우가 잘 없는 중환자실에서 선제적으로 연락을 줬다는 것은 무얼 의미하는 걸까. 설마 어제까지 별일 없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 바닥이 깊어진 걸까. 아니면, 내가 예상하지 못하는 새로운 상황이 생긴 걸까. 걱정 가득한 마음으로 두 손 모아 공손하게 전화를 받은 나는 당황스럽게도 전혀 다른 온도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보호자님, 오늘 면회 오시나요?”
“네. 이제 출발하려고요.”
“그럼 오실 때 가족분들 사진 몇 개만 뽑아와 주세요. 아내 분이 보고 싶다고 하시네요.”
“네. 알겠습니다. 금방 뽑아서 갈게요.”
면회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서는 지체 없이 사진들을 뽑아야 했다. 아내가 가족들을 보고 싶다고 했다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아내는 분명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의사를 피력하기 힘들었을 것 같은데, 지금껏 경험했던 중환자실의 요청 사항과는 너무도 결이 달랐다. 처음으로 생필품이 아닌 것을 부탁받았다. 긍정적인 신호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은데, 설레발치지 않기 위해서 금요일부터 올린 가드를 내리지 않았다. 부리나케 자리로 돌아가서 J형에게 소식을 전달하면서 인쇄할 사진들을 골랐다. 나보다도 설레발을 경계하는 J형도 함께 들떠서 아내가 이제 의사 표시를 할 수 있냐고 되물었는데, 가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 없는 대답으로 들뜬 공기를 가라앉혔다.
우리 가족은 딸의 유치원 겨울 방학 일주일을 맞이하여 2월 말에 3박 4일 스케줄로 홍콩에 다녀왔다. 디즈니랜드에 가보고 싶다는 딸을 위해서 세계의 다른 디즈니랜드 대비 규모도 작고 그다지 붐비지 않는 것 같은 홍콩으로 여행을 추진했다. 가서 홍콩에서 일하고 있는 대학 후배도 만나고 남들이 다 하는 빅토리아 피크 구경과 맛집 탐방도 빼놓지 않았다. 여행의 2일째에는 하루의 전체를 디즈니랜드에 배정하여 다양한 놀이기구들도 타고 불꽃놀이도 즐기면서 오래되긴 했지만 알차고 옹골지게 구성된 테마파크를 온전히 만끽하며 온 가족의 추억을 쌓았다. 하지만, 홍콩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아내는 약 보름간 계속 몸 상태가 좋지 않았고, 그때 보인 전조 증상들이 우리 가족을 여기까지 끌고 왔다.
간호사의 요청에 따라 휴대폰에 있는 사진들을 살펴보는데 가족이 다 같이 찍은 사진을 찾다 보니 결국 홍콩 여행 사진들이 나왔다. 한 달도 안 된 가족여행이었지만, 이후에 영겁 같은 시간 속에서 허우적대서 몹시 옛날의 일처럼 느껴졌다. 쌀쌀한 홍콩의 날씨 속에서 아내에게 벗어주지 않은 겉옷을 입고 있던 내 모습이 얄미웠다. 불과 한 달 전 우리 가족에게도 이런 시간이 있었다니. 사진 속의 아내와 딸, 그리고 나는 활짝 웃고 있었다. 딸이 나에게 얘기하지 않았지만, 할머니한테는 엄마가 돌아오면 홍콩에 다시 가고 싶다고 말했던 모양이다. 딸이 생각하는 완전한 우리 가족의 모습은 이 사진 속의 홍콩에 머물러 있었다.
주로 딸의 단독 사진으로 구성된 휴대폰 사진첩에 있는 우리들의 사진을 여러 장 인쇄하고 대봉투에 담아서 부랴부랴 호출한 택시에 몸을 실었다. 지난주에 매일 다녔던 병원으로의 출근길이 이토록 달라 보일 수 있었을까. 전화기 너머로 간호사의 말을 들은 나는 이미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간 들었던 간호사들의 목소리나 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전화 통화였다. 분명 무슨 변화가 있었는데, 나쁜 변화는 아닌 것 같았다. 병세가 악화돼서 인공호흡기 등의 조치가 필요했다면 분명히 사진 지참 대신 긴급 대응이 필요하다는 급박한 연락이 왔을 것이다. 기대감을 억지로 눌러놨을 무렵, Y네에서 들었던 중환자실에서의 환자 컨디션에 대한 걱정이 다시 들기 시작했다. 만약에 어느 정도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하면 아내는 24시간 하얀 불이 켜져 있는 중환자실을 견뎌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Y엄마가 했던 것처럼 억지로라도 환자를 일반 병실로 옮겨야 하는 것인가 고민되기 시작했다. 무얼 기대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채로, 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흘 만에 만난 장모님과 이모에게 나의 손에 들린 대봉투의 정체에 대해서 설명해 줬더니 그들도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의아해했다. 그들도 중환자실 면회가 끝나면 알게 될 것이다. 지난주에 매일 그랬듯 오늘도 마스크로 가시지 않은 잔기침들을 애써 감추며 면회 일지를 작성했다. 진득한 소독제를 손에 문지르고 중환자실 2번 방으로 어떤 모습을 보더라도 놀라지 않기 위한 열린 마음을 품고 걸어 들어갔다. 실망하지 않기 위해서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작년에 인상적으로 봤던 영화 중 하나인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Spider-Man: No Way Home)>의 MJ가 영화 내내 하는 말이 있었다.
“If you expect disappointment, then you can never really be disappointed.”
최악을 예상하면, 실망할 일도 없다는 뜻이다. MJ는 영화 내내 이 말을 염불처럼 외면서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계속 내비친다. 어떻게 보면, 나는 아내가 입원하고 나서부터 지속적으로 최악을 걱정해 왔기에 자연스레 실망할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무엇을 예상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은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나는 긴장하며 중환자실 2번 방으로 진입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아내의 방에는 간호사들이 없거나 있더라도 아내의 시트를 갈아주거나 수액을 확인하는 등의 통상적인 업무만 했다면, 오늘 아내와 함께하는 간호사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연한 보라색 유니폼을 입은 간호사는 내가 중환자실에서 만났던 간호사 중에서 가장 여유가 있어 보였는데, 아내 옆에 딱 달라붙어서 집중 관리를 해주고 있었다. 일상적인 업무보다는 오로지 아내의 안정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내가 들어갔더니 첫 휴가를 나온 군대 간 아들을 만난 엄마만큼 반가워해 줬고, 아내에게도 남편이 왔으니 괜찮을 거라고 위로해 주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상태가 호전된 아내는 현재 상황을 잔뜩 비관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얼굴이나 몸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운데도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이해되지 않는 사람의 복잡한 심경을 여실히 읽어낼 수 있었다. 아내의 혼란스러움은 여전히 침대의 난간에 묶여 있는 손으로 인해 억압된 상체의 움직임과 중첩되어 더욱더 어지러웠다. 물론, 아내가 시도하는 움직임들이 애초에 크지도 않아 그 처절함은 보다 증폭됐다.
간호사는 아내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안아 주면서 연신 각종 위로의 말들을 건네주고 있는데, 나의 목소리를 들은 아내는 움직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얼굴 근육들을 가까스로 움직이며 금세 눈물바다가 됐다. 어색하게 일그러진 얼굴에서 흐르는 눈물들은 이내 나를 숙연하게 했다. 잔잔하게 일기 시작하는 내 마음속의 동요를 간신히 누르며 간호사에게 급하게 A4 용지에 큼지막하게 뽑은 사진들을 건네줬다. 조력자가 생기니 나는 자연스레 입을 닫게 되었고, 간호사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간호사는 내가 전달해 준 사진들을 아내가 겨우 볼 수 있는 각도를 찾아 스르륵 넘기면서 아내가 우리 가족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해 줬다. 특히 우리 가족이 홍콩 여행을 가서 다 같이 찍은 사진을 거듭 보여주며, 아내를 위로해 줬다. 사진 속 우리 가족은 모두 활짝 웃고 있었다. 아마 아내가 머릿속이 아닌 곳에서 실제로 딸의 형상을 본 것은 열흘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더는 일그러질 수 없을 거라 여겼던 아내의 얼굴과 표정은 행주 쥐어짜듯 있는 힘껏 괴로움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아마 속은 백 배, 천 배는 더 괴로웠을 테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사랑하는 가족과 이산가족처럼 지내는 것을 절대로 납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아내는 자기 몸이 허락하는 만큼 통곡하고 있었다. 눈물은 쉼 없이 흘러내렸고 아내를 만난 이후로 처음 들어보는 절규를 내뿜고 있었다.
이를 보는 것도 만만찮게 힘든 일이었다. 기껏 눌러놨던 감정들은 더 이상 붙잡혀 있는 것을 거부했다. 여러 가지 감정들이 다양하게 섞여서 분출된 눈물들이 또 한 번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주체되지 않는 뜨거운 눈물 속에는 괴로워하는 아내에 대한 안타까움이 가장 컸을 테고, 이제야 회복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한 것에 대한 안도감, 인공호흡기까지 장착하지 않아도 되는 감사함, 엄마와 지면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딸에 대한 불쌍함 등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내는 아직은 나를 보기 위해 자유롭게 고개를 돌릴 수 없었기에, 구석에 숨어서 내가 아닌 아내를 위해 비치된 휴지로 두 뺨에 흐르기 위해 돌격하는 눈물들을 소리 없이 닦아냈다. 울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간호사는 아내의 눈물을 닦아주며 위로해 준답시고 야속하게 소리쳤다.
“환자분~ 울지 마요~ 환자분이 우니까 남편분도 울잖아~”
그래도 간호사의 이야기를 듣고 아내도 진정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이제는 점점 의식이 돌아오는 것인가. 조금은 진정한 듯한 아내는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얼굴의 근육들을 총동원해서 다시 우리 가족의 사진에 집중하려고 무던히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무리였는지 결국 간호사가 우리의 사진을 아내의 눈앞까지 가져갔다.
“딸이 정말 이쁘네요~”
진심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딸 위주로 구성되어 있던 우리 가족사진들을 하나씩 넘기면서 간호사가 아내의 기운을 북돋기 위해서 다정한 말들을 계속 이어 나갔다. 내가 진정되었음을 확인한 간호사는 자연스럽게 내게 바통을 이어서 넘겨줬다. 간호사가 옆에서 보고 있는 게 신경 쓰이긴 했지만, 나는 아내의 손을 꼭 잡고 금요일에 혼자 봤다고 믿고 있었던 1%의 생기를 다시 확인해 보기로 했다. 만약 아내와 대화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면 간호사가 이토록 열심히 아내에게 말을 걸진 않았을 것이라는 기대가 생기기도 했었다.
손을 잡고 초점 잃은 아내의 눈을 보면서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들려?”
“으…”
아내가 G병원 중환자실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상호작용다운 상호작용을 하는 순간이자, 최초로 아내의 몸속에 아내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이었다. 지난주 금요일에는 희미한 등불 정도의 기대가 있었다면, 오늘은 올림픽 성화와 같은 불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아내는 저렇게 굳어 있는 몸 안 어딘가에 살아있었다. 여전히 어려운 움직임이었지만, 지난주와 비교했을 때는 아내의 얼굴에서 표정이라는 것도 엿볼 수 있었고, 아직 손이 묶여 있어서 제대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팔다리도 어느 정도는 움직일 수 있는 것 같았다. 이제는 설레발이 아니라 분명히 바닥을 지나고 반등 구간에 돌입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