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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사리 Sep 29. 2024

긴 호흡

2024 시와사상 가을호 발표작

구멍 속을 들여다본다

열쇠 구멍은 들여다보기 좋은 구조

모든 비밀은 구멍 밖으로 새어 나온다네 

    

구멍은 진실일까 거짓일까

     

구멍 속으로 숨을 불어넣다가 

구멍이 먹먹해진 사람이 절뚝거리며 걷고 있다     


구멍이 아프기 시작하면 

구멍 속에 살던 모든 질병이 

또 다른 구멍 속을 파고든다는데,     


구멍은 질주하고

구멍이 너무 많아 지팡이 든 노인은 

노을 속으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데, 

    

구멍을 오래 맴돌던 사람은 

자주 심호흡을 한다는데,     


구멍 속에는 열쇠가 없다

그렇다면 입속에는 비밀이 없는 걸까  

   

구멍은 왜 터널처럼 

발걸음 소리를 텅텅 울리는 걸까   

  

그러므로 구멍은 

참을 수 없는 말의 무덤     


실어증에 걸린 구멍이 

도무지 소통 안 되는 구멍으로 손을 휘저어

잃어버린 열쇠를 찾고 있다     


밖으로 새어 나올 때 비밀은 제일 신나지

구멍을 빠져나오는 것이 한평생이라 한다면, 

지금은 한 여름밤을 꾸고 있는지도 몰라     

 

가장 극적인 슬픔조차 

지루하고 긴 여름밤의 한 장면에 불과하다면,

평생은 한달음에 지나고 말 

순간들    

 

구멍 속으로 들여다본 것도

그토록 집착했던 일들도 

모두 구멍 속의 일

결국 평생은 긴 호흡이었던 거야   

  

덜컹거리는 기차를 타고

너의 꽃잎을 지나가고

사랑이 별처럼 커졌다가 사그라들고

기차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구멍 속으로 소리마저 걷어가 버리고 말겠지   

  

무릎을 꿇고 구멍 속을 들여다보면

별이 빛나는 밤

누군가 열쇠 구멍 모양으로 웅크리고 앉아 

숨 그네를 타고 있다     


제 구멍 속에 꾸욱 눌러놓고 

끝까지 중력을 잃지 않았던 구멍들이

그네를 밀고 당기고 있다     


수위 조절에 실패한 별들이 

강물 위로 덧없이 떠내려가는 밤    

 

저물녘, 온몸이 구멍인 사람이

구멍을 잠글 열쇠를 찾아 헤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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