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왔습니다. 1월부터 글을 꾸준히 쓸 거라는 목표를 세웠었는데, 글이 무서워졌습니다. 수없이 많은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를 소개하라는 글을 포장하고 포장하면서 좋은 말들을 갖다 붙이는 행위가 역겨웠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닌데, 해당 회사 인재상에 맞춰 적극적인 사람이 되거나 꼼꼼하고 차분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제 모습이, 아직 세상 밖으로 나설 용기가 없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자신을 환기하고자 브루클린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아일랜드가 고향인 주인공이 고향을 떠나 미국의 브루클린에서 사는 내용을 담은 여성 성장 영화였습니다. 내가 보는 만큼만 볼 수 있다는 말은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 '사람들'을 통해 시야를 넓히고 싶었던 추악한 이기심 때문에 인과응보를 받았습니다.
혼자서 독립적이지도 못한 주제에, 누구를 통해 시야를 넓히고 싶다고 생각했던 건지. 내가 지금 사람으로 치유해야 하는 상황인지 어떤 환경인지에 대해서 하나하나 나열해 보기로 했습니다. 저는 지금 도망자로서 제가 살던 곳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하이큐를 보면서 열정이란 단어를 알게 되고 배구를 배우고 일본에서 일하고 싶어 했던 무모하고 꿈 많던 여자아이는 지진을 겪고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전화에 2달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무모하지 않고 겁쟁이라는 나라는 사실을 받아드리고 전공을 살리고자 했습니다. 형사소송법과 형사법이 재미있어서, 이왕 배운 법을 활용하고 싶었습니다. 졸업하고 나서 로펌회사의 지원을 하고 결과를 기다리면서 "검찰청"이라는 말에 끌려 지원을 하게 되었고 집 앞 10분 거리의 직장을 갖게 된 직장인이 되었습니다.
그때도 즉흥적으로, 충동적으로 결정하는 건 변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일을 다니면서 편한 옷을 추구하면서도, 회의나 행사 때는 옷을 갖춰 입어야 한다는 사회초년생의 자세를 배웠습니다. 사람을 대하는 일을 어려워하지만 그래도 노력했고 배우면서 내가 어떤 일을 못하고 잘하는지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꼼꼼한 일을 좋아하지 않고 내가 잘못하지 않은 일로 혼나면 화가 나고 사소한 걸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사실을요. 그렇게 같은 공무원의 남자를 만나서 결혼 얘기가 오고가고 내가 자라온 곳에서 직장도 갖고 결혼도 하겠구나 싶었습니다.
문득, 숨이 막혔습니다.
안정적인 걸 원했고 집에서 독립하고자 했는데 내가 진정으로 바란 게 이거였나? 하고 말이죠. 다른 사람들을 마주하고 만나고 자극받고 싶었습니다.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건강한 자극이 아닌, 도파민이 터지는 환경을 원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25살. 정말 어리석고 얼마나 반짝였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다른 지역에 가서 새로운 시작을 하고 첫 독립도 했습니다.
아, 내가 얻은 8평의 자유. 너무 행복하다.
그렇게 실컷 놀기도 하고 새벽에 무작정 나와서 글도 써보고 그때만큼은 정말 즐거웠습니다. 새로운 일이 힘들고 몸도 많이 망가졌지만 재밌었습니다. 새로운 남자도 만나보고 경험도 쌓였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바라보는 시각, 여자가 남자를 바라보는 시각은 달콤하기도, 아프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집단 내 괴롭힘이 너무 심해지고 내가 겪는 일들이 차마 입에도 담을 수 없게 되니 결국 모든 걸 놓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처음엔 "내가 잘못해서", "내가 미숙해서", "나 때문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피해자인 자신에게서 이유를 찾았던 겁니다. 그리고 침대 안으로 숨었습니다. 씻는 것도 먹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내려놨습니다.
모든 게 "내가 살아있어서"이니깐요. 핸드폰 번호를 바꾸고 오늘도 어두운 방안에서 유튜브를 보고 있었는데 커튼 사이로 햇빛이 들어왔습니다. 벌써 봄이었습니다. 날씨가 좋아지고 꽃이 피고 그리고 그날이 생일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처음으로 맞이 한 혼자만의 생일. 아무런 축하도, 감사인사도 없는 생일. 오랜만에 밖으로 나갔습니다. 오후에 걷는 햇빛은 따스했고 기분이 좋았고 지나친 베이커리에서 좋아하는 고구마케이크를 샀습니다. 홀케이크에 초를 꼽고 나를 위한 기도를 하고 숟가락으로 케이크를 힘껏 퍼먹었습니다. 나는 내 생일에 나를 위해 고구마 케이크를 사 먹을 수 있는 단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모두 어깨에 무거운 짐을 이고 있다. 행복과 불행은 예고도 없이 찾아오곤 한다. 언제 올지 모르는 존재들을 무서워하며 불안해하기보다는 같이 함께하고 이겨내는 마음으로 바뀌었습니다.
단단하고 싶어서 단단해진 것이 아니라, 내 안이 "나"라는 사람으로 꽉 차서 몽우리가 피어났음을 느꼈습니다.
눈에 띄게 삶이 바뀌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많은 걸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지금은 안에서 곪아지진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오늘도 저라는 사람을 정리하고 자소서를 써보려고 합니다.
회사는 자아를 실현시키는 곳이 아닌 것을 알지만 적어도 나라는 사람이 어떤 회사에 맞는지, 어떤 가치관을 중시하는 회사에서 일하고 싶은지는 선택한 삶이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열정적으로 삶을 살고자 하는 모든 취준생, 청년들 파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