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재회 01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신명 Oct 23. 2024

무유의 방

로마 역사서가 이미 정해져 있듯이 펼치자마지 그대로 그대로 사랑이 되었다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시인과 오래 살더니 시인이 다 되었다며 눈물을 훔치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시와 함께 살고 싶어 치열하게 고뇌하던 거대한 벽 앞에서

이상을 쫒다 스러진 뼛속까지 시인이었던, 시를

간절히 열망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은 왜 나와 아이들을 위한 시를 안 쓰는 거에요 

라는 물음에 즉석에서 불러주는 시를 황급히 받아 적던

순간이 떠오릅니다


투병 중인 그가 갑자기 쓰러지기 며칠 전 유언처럼 안겨준

마지막 사랑의 몸짓이었습니다

그 후 오랜 인고의 시간이 폭풍같이 흐른 뒤에야

저는 비로소 제대로 된 시의 길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책상 위에 쌓인 시집 속 밑줄 그은 별이 지고

독자에서 화자로 걸음이 바뀐 순간 어쩌면 그가 못다 한 말을

대신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페이지에는 그를 떠나보내고 난 후 긴 세월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고 간직해 온 그의 시가 적혀 있습니다

또한 제가 상실에 갇혀 신음처럼 토로하던 혼잣말과

하늘로 띄워 보낸 답시가 있습니다

언젠가는 세상에 나가 소중히 펼쳐 보이고 싶었던 시간들

지금이 바로 그때인 것 같아 문득 아득한 뒤를 돌아보며

가슴 깊은 곳에 저장해 두었던 보석 상자를 엽니다

             



박태석 시인의 유작 시     


무지막지한 부끄러움          


내 어린 나이에 순수한 사랑이 싹틔웠다     


언뜻언뜻 스치는 형체나 목소리는

이미 내 머릿속에 정해져 있었던 가 보다     


어느 날 나는 처음,

그대라고 큰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쑥스러워 온 얼굴이 홍당무가 된 채로

아무 데도 뒤돌아보지 못했다     


그대 손길은 항상 준비되어 있는 듯

상냥하고 간편하다     


도마 위에서 아침마다 타닥거리는 우리들의 유희

언제까지나 나는 그 유희가 즐겁다     


속이 빤히 다 베고 보이는 게임인데도

지치고 지칠 줄을 모른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들의 사랑은 계획되었던 거다

말하기 전에 연애는 먼저 시작되었다     


로마 역사서가 이미 정해져 있듯이

펼치자마자 그대로 그대로 사랑이 되었다          



당신     


그대 가슴은 언제나 내 가슴의 눈물의 바다였소

그대를 가슴 가득 안는 순간 세월을 느꼈소

서정주 시인 부인도 오래 같이 살다 저절로 시인이 되었다 하더니

그대도 어쩌다 나를 팍팍 울게 만드는 걸 보면

시인이 다 되었소

나는 그대를 약하다 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아들, 딸을 생각할 때면 떨리는 마음입니다     



사랑     


옛날 달력을 버리지 못한다는 당신의 말에 나는 눈물짓는다

그래서 당신을 버리지 않는다는 말은 더욱 슬프다          



부부싸움     


그대보다는 내가 말에 더 뉘앙스를 깊이 쓰기 때문에

그대는 그 점이 조금 약하거든

그래서 우리들의 논쟁은 소란스러워지고

밑도 끝도 없는 말장난이 되고 말지          



아들     


너 이 녀석 아들은 군대 좋은 줄 알아라          



     


딸하고 이름 부르는 순간 그것은 한순간 바로 통한다

언제부터인가 이어온 아빠와 딸의 숨바꼭질

새벽녘 아직도 덜 깬 잠을 추스르며 기도 자국이 남아 있는 채로

한숨이 뚝 떨어지지 않는데

아빠는 너의 그 기도 제목을 통째로 다 외우고 만다          



방울이     


눈이 커서 방울이라 지었더니

시도 때도 없이 왕방울을 오히려 내게 부라리는구나          



무제 1     


산다는 것의 명쾌한 해답 배고파      



무제 2     


피를 토한다고 토하는 대로 다 피가 아니다

한숨 소리가 그대로 피보다 진하게 맺힐 때가 있다                



조회          


새들의 몸이

저리도 가벼운 것은

새벽 안개를 마시며

지저귀는 탓이다.     


꽃잎이 저리도 붉은 것은

새벽 이슬에 몸을 씻은 탓인지     


하늘 허리춤 어딘가에

태양이 하루의 불을 지피면     


연미복 걸친 구름은

또 하루의 도보에 나서고,

바람은 벌써 안달을 한다     


어디선가

수로 뚫리는

뻐근한 조짐이 들려오고     


여명 속에 임립한

나무의 신장이

어제보다 늠름함을 깨닫는다     


아!

하나밖에 없는 말씀이여,

이 아침 속에서 나는, 감전된 듯

그대의 실체를 느끼며 서 있다.               



불면증          


이 설레임의

근원은 어디쯤인가?


그것은 도대체 짙은 안개와도 같아서

절벽 끝에 나를 갖다 놓기도 하고

때로는 눈부신 신록의 뜨락에

쏟아지는 햇살 같기도 하였다.     


불면의 밤이 계속되고

충혈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어떤 날에는

사거리마다 동상이 서고

하늘이 바다 같기도 하였다     


헛기침으로,

동전 한 잎 같은 자존심이

아직도 심장 복판에 남아있음을

확인하는 동안     


먼발치에서부터, 서서히

행진곡이 시작되면서

장마 속에 돌아앉은 산들은

하품을 하고 있다               



순수의 빛          


아무리 둘러봐도 벽뿐이다

거대한 어둠 속에서

시나브로 흔들리다가     


몇 광년 지나가서야

멈추어질까

그대, 여린 한숨이여     


바람이 없어

새도 날지 못하는 곳,

눈을 감는다.

칠흑 심연 한 가운데

맨발로 서서

모든 것을 버리고서야

비로소 얻은 자유     


눈물 한 점이      

야광충처럼 반짝이고 있다.               



《강신명의 시》          


실연     


 사람이 스러졌다

나에게 그 사람은 우주였다     

아아!      

나는 우주를 통째로 잃었다     

졸지에 나는 미아가 되어 버렸다     

그의 그림자 밑에 웅크려     

밥 먹을 줄도 모르는               



갈망          


실컷 울고 싶었습니다.

다리를 뻗고 소리 내어

울고 싶었습니다

가슴을 저며 내는 아픔을 전부

토해내고 싶었습니다

울다가 살다가

웃다가 살다가

산다는 것은 그렇게

지나갑니다

시려오는 바람소리가 서럽고

가슴가득 고여 있는 그리움은

멍이 되어 쌓여 있습니다

손을 뻗어 그 사람을

잡아보려 합니다

눈을 감고 그림자를

느껴보려 합니다

살아있는 것이 끝이 아니길

육신이 끝이 아니길

죽음이 끝이 아니기를               



후회          


한 번만 더 눈을 맞출걸

한 번만 더 입을 맞출걸

한 번만 더 손잡아 볼걸

한 번만 더 안아 볼걸

한 번만 더 사랑해

라고 말할걸  


 

당신               


드라마 속에서

치매 걸린 할아버지가

잠시 돌아온 온전한 정신으로

첫사랑이었던 할머니에게

수선화라는 시를 지어준다     


, 우리도 그랬었지

당신도 얼마 남지 않은

생 속에서 허허 웃으며

나를 위한 시를

나직한 목소리로 읊어 주었었지     


오늘 밤 꿈에는 당신을

보았으면 좋겠다

내 눈을 살포시 들여다보며

생시처럼 꼬옥 안아

주었으면 좋겠다     


파도처럼

보고 싶은 당신     



당신을 다시 만난다면


당신을 다시 만난다면

호젓한 강가 벤치 위에

시집을 펼치리라     


시속의 낙원을 같이 거닐며

한낮의 달콤한 꿈을 꾸리라     


당신을 다시 만난다면

꼭 잡은 두 손에

꽃향기 가득 담고

잎새 사이사이 반짝이던

햇살을 찾아가리라     


물안개 피어오르고

산새가 이슬을 먹던

그 숲속에 집을 짓고 살리라     


당신을 다시 만난다면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내가 먼저 말하리라     


사소한 일로 다투기 전

무엇이 그리 힘들었는지     

서로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눈에 비친 설움의 기억을

같이 보듬자 하리라     


이 모든 것이 꿈이였다 해도

나는 좋아라     


이 모든 것이 하루였다 해도

나는 좋아라     


이 세상 어디서든

당신을 만날 수만 있다면               



은행나무 집에 은행나무가 없는데           


사람들은 아무도 묻지 않아요

낯선 해가 뜨는 동안

무표정한 시간이 하루를 점령하고

새벽안개 헤치고 걷다 보면

노란 지붕 위에 노란 새가 울고

은행나무는 없는데 은행잎은 뒹굴고

바람은 쓸쓸하고 깊어

길은 여전히 세상을 쓸어 담아요

은행나무는 돌아오지 않고

은행잎은 샛노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천사의 날개는 은행잎을 닮아가요

은행나무는 꿈으로 잠겨 있고

은행잎은 구름다리를 건너온 별인가요

은행나무 집에 은행나무가 없는데

사람들은 아무도 묻지 않고

열매는 또각또각 곰삭은 노래를 부르고

부치지 못한 은행잎 하나

노랗게 멍든 하늘을 날고 있어요

은행나무 집에는 은행나무가 없는데               



무유無有의 방          


시간 더미 속 죽음이 수북이 쏟아져 나온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겨울 철새

로 날다 너 닮은 가지 끝에 매달려 너를 탐닉하는 일 손길 닿지 않는 것들은 이미

부재로부터 빠져나와 죽어있던 나의 안부, 조롱에 갇힌     

 

 죽음을 한 장씩 찢는다 바람 소리로 돌아오는 따옴표들      


흐린 눈빛 감추며 돌아선 너의 심장을 수배하며 머문 뼛속까지 서걱대는 외길 떠도

는 먼지가 모든 죽음의 결정체라면 새벽은 동쪽으로 머리를 누이지 말았어야 했다

말라붙은 솜털에 입술을 대본다 채 태우지 못한 표정 뒤로 마지막 눈물 한 방울

배인 내가 보는 세상은 너의 꿈일지도 몰라      

 

 죽음을 한 장씩 찢었다 바람 소리로 지워지는 물음표들     


어둠 붉은 밤에는 피톨 너머 저장된 빛이 한동안 숨을 끌고 갔다 귓불에 바짝 붙은

바람 속살거리면 풀렸던 동공이 땅을 딛고 말을 건넸다 구름 덮인 수면 헤치며 침

잠하는 꽃잎들 모든 끝은 소리가 매듭을 짓는다 얼룩진 혼잣말이 빈방 삼키기 전

너를 놓아줄게 피멍 들어 떨어져 나간 발톱 밑 새살 돋는 건 꿈이 아니라서      

 

 틈새에서 온전히 죽지 못해 엎드려 울던 언어들아      

 

 이젠 내 머리 위 햇살이 될 것     

 

 너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것,  



살아야 하는 이유                    


골목 어귀 지붕 덮은 나무

볼품없는 몸통에 시든 잎새를 잔뜩 달고 있다

주위는 한창 싱그런 초록 물을 뿜어내는데

혼자 계절을 앞당겨 여위어 간다     


지나치게 커버린 몸집이

동네를  성가시게 한다는 이유로 구박 받는

버림받은 나무다


차마 베어내지는 못하고 온갖 방법으로

더는 하늘로 가지를 못 뻗게 했으나

봄이면 다시 새순 무성히 오르는 끈질긴 생명     


그러던 어느 날

온몸을 파르르 떨며 부러질 듯 바짝 마른 가지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작은 새 한 마리가 가지 끝에 앉아 있었다


나무와 살갑게 놀다 다시 오는 새

새는 한참을 그렇게 나무와 함께 지내다

더는 보이지 않았다     


이제야 나는 알았다

자신을 갉아 먹는 모진 시련 속에서도

왜 그 많은 눈물을 오래도록 달고 있었는지를     


고통의 손을 잡고서라도

끝내 이 세상에

살아 있어야만 하는 이유를             



         

시를 힘겹게 뱉을 때마다 구름은 비를 뿌렸습니다

젖은 몸을 말리며 걷다 보니 제 이름 옆에 시인이란

생소한 말이 붙어 있었습니다

참으로 기쁘고도 무거운 이름입니다     


언젠가 쓸쓸하고 아름다운 정경에 매료되어 깊숙이 동화되었던

김용택 시인의 11월의 노래가 생각납니다

그 시 속으로 들어가면 익숙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고

강가에 하염없이 앉아 치마에 붙은 홀씨를 하나씩 떼며

지친 하루를 강물로 흘려보낼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제각기 맞는 더듬이를 찾아 달고 생을 이어갑니다

고통의 순간을 언어로 발화시켜 생의 비의를 견딜 수 있게 하는 힘,

저에겐 그것이 시이고 양지로 이끌어준 더듬이였습니다

제 시도 누군가의 꺼지지 않는 더듬이가 되어

축축이 젖은 등을 일으켜 주길 소망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