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알림 메시지. 쌓여만 가는 읽지 않은 메일함. 읽지 않음 +999를 띄우는 업무 메일과 회사 메신저와 고군분투하는 나날들. 퇴근 후에도 울려대는 카카오톡 업무 단체방의 대화들이 지겹게 느껴지는 순간마다 생각했다. 집인데도 집에 가고 싶다. 퇴근 후 업무 단체방에 뻘 소리 하는 사람들을 보면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장애가 터지면 새벽 6시부터 고객사의 전화에 몸살을 앓는 게 일상이었다. 새벽부터 부재중 전화가 쌓여있으면 '아, 오늘도 터졌구나.' 한숨으로 아침을 맞이하고는 했다. 비단 평일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주말에도 고객사에서 개인 핸드폰으로 연락이 온다. 그마저도 연결이 안 되면 카톡이나 문자를 남겨둔다.
'매니저님. 급하니까 연락 주세요.'
입사 초기부터 재택근무를 병행한 터라 고객사에 개인 번호가 자연스레 노출되었다. 고객사 담당자들도 문의가 있을 때 개인 핸드폰으로 연락하는 일이 잦았다. 일과 일상이 하나로 뒤범벅되어 가는 줄도 몰랐다. 당연히 감내해야 하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주말 아침에도 전화가 오고, 업무가 종료된 늦은 밤에도 연락이 왔다. 속으로 투덜대면서도 재택근무가 복지다 생각하며 감내했다.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밤마다 슬랙 알림을 보면서 아침 일과를 미리 정하고 우선순위를 정했다. 출근하면 이 건부터 처리해야지 다짐하면서 잠에 들었다. 출근이라고 해봤자 눈곱 겨우 떼고 침대 옆 책상으로 이동하는 짧은 동선이지만 그래도 출근은 출근 아닌가. 집에서 근무하면서 태만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자율성을 믿고 맡긴 거라 생각했기에 스스로 잘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은근한 압박에 시달렸다. 고객사가 필요로 하면 주말에도 기꺼이 일을 하며 불합리한 상황을 견디려 했다. 재택근무를 회사에서 주는 유일한 복지라 여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작년 1월부터 재택근무가 전면 폐지되면서 강남으로의 출퇴근이 시작되었다. 강남역과 양재역 사이 애매하게 위치한 회사 덕에 지하철역에서도 한참을 걸어야 했다. 그렇게 왕복 3시간가량을 길거리에서 허비하는 생활로 돌아갔다. 재택근무에 길들여져 지하철의 매운맛을 잊어버리고 살았다. 이따금씩 출근하긴 했지만 자율 출근제로 출퇴근 시간이 자유로웠던 터라 한산한 시간대에 출근이 가능했다. 코로나도 끝났겠다, 전 직장들이 답함을 해서 재택근무를 없애버린 건지, 강남으로 향하는 지하철은 불닭 맛이었다.
출근만 매울쏘냐. 퇴근은 더 매콤했다. 강남역에서 지하철로 향하는 계단 입구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기를 수십 분. 서너 대의 지하철을 보내야만 겨우 탑승할 수 있었다. 그것도 문에 딱 달라붙은 문어 빨판 같은 모양새를 하고서야 겨우 강남 탈출이 가능했다. 입사한 지 만 2년 만에 매운 회사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출퇴근만으로도 기가 잔뜩 빨린 K 직장인의 하루는 매일이 고단했다. 창백한 얼굴로 '좋은 아침입니다' 인사를 나누는 순간부터 오후 6시에 울려 퍼질 퇴근송만 기다리는 무한 굴레의 반복이었다.
"저 이번 달까지만 근무합니다."
팀장님의 청천벽력 같은 퇴사 소식이 날아들었다. 주말도 저녁도 없이 회사를 위해 일해온 워커홀릭 팀장의 이직 소식은 내 마음까지 느슨하게 만들었다. 재택근무가 끝난 후에도 끝도 없이 이어지던 연락으로 몸살을 앓을 즈음이었다. 받기도 애매하고 안 받기도 애매한 상황이라 고민하던 찰나였다. 온몸을 바쳐 장애를 막아온 동료 1을 잃은 나는 적당히 걸러 받는 스킬을 쌓아가는 3년 차가 되었다.
업무의 쳇바퀴에 치여 모든 게 시들해질 즈음 나 역시 퇴사를 결정했다. 첫 재택근무로 설레하던 2년의 시간과 이후 1년 반의 시간을 모두 정리한 셈이다. 퇴사 준비가 순조로웠다면 좋았으련만 빌런 P의 탈주로 퇴사 마지막 날까지 팀의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해야 했다. 본인의 결혼식도 아닌 동생의 결혼식 참석을 핑계로 보름 간의 휴가를 내고 캐나다로 날랐다. 그 덕에 퇴사 전날까지 팀의 모든 업무를 도맡아 처리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빌런 P의 탈주로 인한 업무적 이슈 외에는 모든 게 평화로웠으므로.
퇴사한 날의 첫 번째 일정은 회사와 관련된 모든 앱을 삭제하는 일이었다. 회사 건물을 벗어나 집으로 걸어가는 길목이었다. 매일같이 울려대던 슬랙부터 처리하자. 출근하는 길에도 잠들기 전에도 늘 눈이 가던 슬렉의 알림 메시지. 고객사의 요청이 실시간 전송되기에 눈을 뗄 수 없던 지독한 어플에서 벗어날 시간이었다. 슬랙을 검지 손가락으로 꾹 눌러내자 메시지가 표시되었다.
- 이 어플을 제거하시겠습니까?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확인 버튼을 클릭했다. 먼데이 앱도 플렉스도 말끔히 지워냈다. 물론 회사 앱도 빛의 속도로 삭제했다. 그동안 고마웠고 다시는 보지 말자.
이제는 불닭 맛 출근길도 매콤한 퇴근길도 없다. 아침이 되면 뱁새눈을 뜨고 스트레칭을 한다. 침대의 포근함이 좋아 미적거리다 엄마에게 등짝 스매싱을 맞기도 한다. 침대의 달콤함을 뿌리칠 수 없는 집순이는 엄마의 잔소리에 못 이기는 척 일어난다. 오전 9시에는 도서관, 오후 2시에는 피아노 학원, 저녁 7시에는 헬스장에서 운동하기로 했지만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아점을 먹고 느지막이 도서관으로 향한다. 종이책의 버석한 질감을 느끼며 오래된 종이의 내음을 들이켠다. 몽글거리는 구름이 발길을 붙잡는 날은 가던 길을 멈추고 안양천 변으로 행선지를 튼다. 햇볕에 바짝 말린 보송한 빨랫감처럼 벤치에 한껏 널려있다. 볕이 좋아 산책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날씨라 중얼거리면서.
더는 플렉스 어플을 켜서 출근 기록을 하지 않는다. 슬렉의 알림 메시지를 보며 오전 계획을 세우지도 않는다. CX팀이 전달하는 긴급 먼데이 건도 나와는 무관한 일이 되었다. 이제는 나의 루틴에 맞춰 원하는 시간에 산책을 즐기고 운동을 간다. 오늘의 책을 고민하며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맞이하는 아침. 신중히 고른 두 권의 책과 텀블러를 담은 에코백을 메고 동네 야산으로 향한다. 오늘은 오에 겐자부로의 <읽는 인간>을 읽는 '읽는 인간'이 되어본다. 삐이삐잇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맛보는 책은 다정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언제든 곁을 내어줄 싱그러운 초록의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