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1988)
어릴 때 나는
오래 세수를 하는 아이
물이 좋았던 게지
차갑고 시원한 물이 살에 닿는 게 재미났던 게지
꽃이 이뻐서
꽃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고
하늘이 푸른 날
양팔을 벌리고 달리다 구름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요즘은, 책을 보면 눈이 아픈 요즘은
왜 자꾸 어린 날이 생각나는지
아프지 않았던 어린 날이 좋은 게지
깃털처럼 가볍고
눈이 맑았던 어린 날이 그리운 게지.
이 브런치를 십 대로 돌아와 마무리하고 싶다. 집안 어른들의 말을 빌리면 나는 어릴 때 유난히 세수를 자주 하는 아이, 무엇이든 손에 쥐고 끄적이면서 낙서인지 무언지 모를 메모를 잘하는 아이였다. 각 가정에 다이얼을 돌리는 전화기가 보급되기 시작하던 시절, 친척분이 왔다 가시면서 자기 집 전화번호를 말씀하시면 내가 얼른 적어두었다가 나중에 알려드리고 칭찬을 받곤 했다. 그다지 심한 것은 아니었으나 우리 집에서도 남아선호사상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존재하였다. 하지만 딸 넷 중에서는 막내였으므로 나는 귀여움도 많이 받으면서 자랐다.
아마 4~5살 쯤에 옛집 대청마루에서.
우리 집은 마당이 넓어서 그랬는지 고깃배가 잡아온 생선들의 값을 매기는 새벽 경매를 우리 집 마당에서 할 때가 많았다. 먼동이 아직 트기 전, 어스럼 새벽에 일어나 마당을 보면 도다리, 가오리, 갈치, 고등어들을 죽 늘어놓은 나무상자가 보이고 시끌벅적한 가운데 누군가(아마도 경매인) 생선상자 중에서 한 마리를 갈고리에 척 꿰어서 허공에서 생선을 보여주면 너도 나도 생선 상자 하나의 값을 불렀던 것 같다.
내 밑으로 여동생이 한 명 더 태어났으나 아주 어릴 때 몸이 아파 죽었다. 할아버지가 죽은 내 여동생을 항아리에 넣어 저멀리 산에 가서 파묻고 오셨다는 이야기를 하셨을 때 엄마는 아주 슬피 우셨고, 대청마루에 앉아있던 나도 많이 울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약간 편집되었을 수도 있으나 이것이 나의 최초의 기억이 아닌가한다.
그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무려 18년 5개월(1961~1979)의 장기 집권을 한다. 학생 수가 많아서 2부제 수업을 할 때면 점심을 먹고 나서야 학교로 가서 오전반 아이들이 다 돌아가고 난 교실을 오후에는 우리가 사용하고 우리가 오전반일 때는 그 반대로 하는 식의 수업을 했다. 베이비붐 마지막 세대였다. 모든 교과서의 제일 앞장에는 '국민교육헌장'이 있었고,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되어 무려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것을 달달 외워야했다.
내가 초등학교(그때는 국민학교) 4학년 때, 광주사태가 일어났으나 그때는 전혀 몰랐다. 언론이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었고 나중에야 뒤숭숭한 소문이 좀 떠돌았으나 아무도 진실을 쉽게 말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후에 20살이 되고 난 후, 광주 망월동에 가서 빼곡히 늘어선 묘지들을 보고 그날의 진실을 접하면서 소름이 돋았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 때는 '산울림'의 노래를 많이 들으면서 고등학교 연합고사 준비를 위해 밤 10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하던 기억이 있다.
내가 시라는 것을 처음 썼을 때를 떠올려보면 아마 9살때 쯤이었던 것 같고, 제목은 '가을 하늘'이다.
가을 하늘 / 한수남
높고 높은 가을 하늘
엄마 구름
아기 구름
다 어디 갔을까?
세상을 구경하다가
낮잠 자러 갔나봐.
뒤에 내용이 이어지는데 지금은 기억이 안난다. 중학교 2학년 때는 '너의 눈 속에'라는 제목의 시로 소년일보인가 하는 신문에도 실렸는데 그 시도 정확한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다.
너의 눈 속에 / 한수남
너의 눈 속에
바다가 살아
푸른 파도 철썩이고
갈매기 울음 우네
너의 눈 속에
하늘이 살아
뭉게뭉게 흰 구름
피어 오르네
아마 이것보다는 잘 쓴 것 같은데 이것도 정확하지 않다. 잘 쓰든 못 쓰든 역시 기록을 해 두어야 할 것 같다. 고등학교는 고향을 떠나 진주에서 진주여고 (올해 개교 100주년 행사를 했으니 1925년 일제시대에 개교한 지역의 명문학교이다. )를 다녔는데 언니들이 많아서 함께 자취를 했다. 그당시는 한 학년 학생 수가 600명에 달했고 교련 수업도 있었고 교칙은 엄격했다. 나는 한승원(작가 '한강'의 아버지)의 소설을 즐겨 읽었고, 주로 문예반에 들어갔고 학교 대표로 '개천 예술제'에 나갔는데 장원은 아니었으나 '차하'를 받은 적도 있었다. 그렇게 십 대를 보내고 이십 대의 시절로 건너갔다. 스무 살이 되던 해 나의 할머니께서 돌아가신다. (내 시 곳곳에 할머니 이야기가 나올 만큼 할머니와 나는 영혼의 단짝이었다.) 장례는 집에서 치렀고 마을 사람들이 상여를 메고 선산이 있던 장지까지 걸어서 이동했다. 그때 스무 살에 쓴 시가 용케 컴퓨터에 남아 있었다.
정말이군요, 당신은 떠나신 게 분명하군요.
울긋불긋 빨갛고 노란 상여꽃
하늘로 솟아 흔들리기 시작하고
할머니, 중풍으로 누워만 계시던 할머니.
요강 한 번 제 손으로 비워드리지 못하고
냄새난다고 맨날 툴툴거리기만 했는데
손안에 있던 손녀딸도
아파 드러누우니 쳐다보려고도 않는다고
얼마나 서운하셨나요.
이젠 정말 편히 쉬세요, 할머니
열여섯에 머리 올리고 떠나오던 고향 길을 버리고
육이오 난리통에 행방불명된 남동생 얘기들을
이 길에다 오늘 버리고 가세요.
보릿고개에 자식 굶기던 뼈저린 기억이 새삼
발목을 붙잡았군요.
오뉴월 볕살, 망초꽃 따갑게 날리는 길에
잠시 상여가 쉬고
유난히 잔걱정 많던 그 눈길로 마지막 한 번
뒤돌아보고 계신 건가요, 지금.
하라카는 대로 해야제
순하게 흙만 파시던 칠십 평생을 훌 훌
그래요, 훌 훌 털어버리고 가세요.
올려다 본 하늘은 저리 파래서
붓은 눈에 둥 둥 확대되고 있어요, 상여꽃
어쩌지요 저는 자꾸만 작아지는데
흩날리고 흩날리는…, 할머니 얼굴.
이쯤에서 이 브런치를 마무리하면서 비교적 최근에 쓴 시작메모를 하나 가져와 본다. ------------------
문학은 죽은 자와 산 자의 연결 고리이다. 이미 죽은 자들이 시나 소설, 에세이 속에 소환되어 그들의 억울함을 털어 놓거나 소원 풀이를 한다. 문학은 또한 산 자들의 욕망을 대변하는 고도의 예술 행위이다. 심지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존재조차 잠정적인 독자로 문학 속에 미리 존재하기도 한다. 하지만 쓴다는 행위는 절대로 쉬워지지 않는다. 쓰면 쓸수록 더 어렵다는 것을 아는 존재야말로 진정한 작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작가란, 이 토대 위에서 무언가 한 발이라도 더 나아가려는 가련한 몸짓을 하는 존재가 아니겠는가. (날마다 찾아가는 수수한 시 9 소개글 중에서)
이번 2025년 여름에는 유난히 폭우와 무더위 등 기후위기의 징후가 심해져서 다들 힘들게 여름을 건너가고 있다. 이 모두가 인류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라 딱히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문제가 있으면 있는대로 해결하면서 살아야지 별 수 있나 싶다. 다만, 소박한 행복이나 눈물겨운 희생의 가치가 훼손되지 않고, 맑고 순수한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 좀 살아가기 편한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보면서 이 브런치를 그만 맺을까한다. 앞으로 내가 쓰는 글이 어떤 형태를 띄게 될지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이번 브런치북을 통해서 과거의 나와 화해하는 시간이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 나자신이 치유되는 느낌이 있었다.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내 부족한 글을 읽어주시고 공감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중2 수학여행 (15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