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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청 Nov 18. 2024

글쓰기에 타고난 성향

폭발이, 바쁨이, 울컥이

  나의 여러 가지 자아 중에는 무언가에 억눌려 늘 욱하는 다혈질 자아 ‘폭발이’가 있다. 그는 늘 억울하고 못마땅하다. 톡 건드리면 터져 나오는 봉숭아 씨앗처럼 발발거린다. 폭발이 때문에 대학 시절 친구들은 지도교수님께 단체로 불만을 표출할 일이 있을 때 나의 입을 막았다. 쟤 좀 잡고 있어. 또 욱해서 교수님한테 막무가내로 달려들라. 하여튼 다혈질이어가지고. 진정, 진정해.


  그 옆엔 다급한 자아 ‘바쁨이’가 있다. 바쁨이는 당장 문제가 처리되지 않으면 숨조차 제대로 쉬어내지 못한다. 늘 입에 달고 사는 말은 '당장, 지금, 빨리, 여기서'이다. 덕분에 내 생활은 남들보다 빠르고 바쁘고 신속하다. 누구보다 정확하게 일처리를 해서 넘기고 나면 더 많은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이란 원래 끝이 없는 법. 그럼에도 바쁨이 덕분에 나는 일로 가득 찬 심해를 헤매곤 한다.


  몹시 감정적인 자아 ‘울컥이’도 있는데, 울컥이가 발현되면 주변 사람들은 나를 어쩌질 못한다. 별것 아닌 일에도 눈물이 지나치게 넘쳐서 나중엔 '오로지 울기 위해 우는 일을 만드는 것인가'하는 의심을 품게 만드는 자아. 울다 지쳐 위를 올려다봤을 때 하늘은 푸른색이 아니라 청록색이었다. 가끔은 산소가 필요해질 때까지 우는 것이다.      


  이 세 자아는 나의 사회생활을 때때로 아주 곤란하게 만들었다. 세상은 다혈질에 다급하고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행히 눈치는 있어서 내 자아를 진두지휘하는 최고참의 자아는 멋대로 튀어나오려는 폭발이와 바쁨이와 울컥이를 꾹 누르기도 하고 아직은 발현될 때가 아님을 줄기차게 일러주기도 했다. 그렇게 내 안에서 자아들끼리 협상하며, 또는 서로를 겁박하며 지내왔다.     


  이런 나에게 가장 힘든 순간 중 하나는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하기'였다. 내 뜻을 수월하게 표현하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아 마음이 다급했고, 감정적이 되었으며 가끔 비판이나 적절한 지적이 생기면 뜻 모를 폭발이 뒤따르곤 했다. 할 말을 준비했음에도 심장은 튀어나와 손바닥 위에 댕그랗게 앉아있었다. 말을 하면서도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뱉는지도 모르겠고, 뱉고 있는 게 말인지 침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폭발이와 바쁨이와 울컥이 셋이서 아주 골고루 충돌하며 기어 나와 나를, 무엇보다 내 주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그래서 무언가 협상할 일이 생기면 '쟤는 맨 뒤로 빼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아! 그래서 대학 시절 친구들이 내 입을 막았구나!)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세 자아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먼저 튀어나오려 하는 바람에 늘 엉망이 되고 만다. 이런 나에게 최적의 의사소통 수단은 '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찬찬히 쓰는 동안 들쑥날쑥한 감정은 동그랗게 말아 들며 통제가 된다.  쓰는 시간만큼은 문장을 생각하고 있기에 무언가를 미루지 않아도 되었다. 또한 울분이 튀어나오면 그 느낌 그대로 글에 표현하면 될 일이다. 다행히 사회화가 적절하게 된 나는 말보다 글에서 훨씬 효과적으로 감정을 표출할 수 있었다. 덕분에 글 쓰는 시간이 할 말을 생각해 내는 시간보다 짧을 때가 많았고, 내가 쓴 글이 사람들의 마음에 말보다 더 효과적으로 가 닿을 때가 있었다.     


  글쓰기는 연습과 훈련으로 길러지지만 이렇게 불리하고도 타고난 성향의 힘으로 길러질 수 있는 모양이다. 마흔이 넘은 나는 여전히 나를 수시로 황당하게 만드는 세 자아에 아주 잠깐 감사함을 느낀다. 그렇지만 내일 회의 시간이 마무리될 때까지는 꾸욱 밟아 누르고 싶다. 얘들아, 나오지 마. 제발 나오지 말아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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