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전 11시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학교에 가지 않는 주말이면 정녀는 늦잠을 자다 일어나 엄마 뒤를 쫄래쫄래 따라 나갔다. 그럼 엄마는 아직 말랑말랑한 여린 손에 호미와 바구니를 쥐어 주었다. 어느 날은 고추, 어느 날은 감자와 고구마, 어느 날은 양파 따위로 바구니를 채우고 나면 새참을 먹을 수 있었다.
살얼음을 동동 띄운 콩국수나 열무김치를 썩둑썩둑 썰어넣은 비빔국수, 고소한 기름장에 찍어먹는 메밀묵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호미질을 할 만큼 정말 맛있었다. 하지만 가끔씩 정녀는 새참의 유혹을 거부하고 동네를 돌아다녔다. 작살처럼 지면에 내리쬐는 뙤약볕 아래 노동은 새참을 마다할 만큼 고약한 것이었다.
다행히 오늘은 호미를 쥐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다. 대신 바닥이 새까맣게 탄 양은냄비와 후라이팬이 쥐어졌다. 그래도 정녀는 고물을 싼 보자기를 기쁘게 멨다. 고물상에 들리는 것은 농사일에 비하면 누워서 떡 먹기인 심부름이었다. 더불어 시내구경을 하는 것도 재밌었다.
시내는 언제나 활기가 돌았다. 온통 흙과 풀떼기뿐인 집이 겨울잠을 자는 깨구락지라면, 시내거리는 목청 좋게 우는 여름 깨구락지였다. 정녀는 고물값을 받은 지 오래지만 일부러 같은 거리를 빙빙 돌며 시간을 때웠다.
요즘 들어선 부쩍 더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졌다. 가봤자 일만 작살나게 하는데 굳이 갈 이유가 없었다. 첫째 언니는 일찍이 이 부조리를 깨우친 현자였다. 언니는 좀처럼 방구석에 붙어있는 일이 없었다. 근래 들어선 그 빈도가 더욱 잦아졌다. 지금쯤이면 아마 근처에 있을지도 몰랐다.
‘언니 만나면 같이 가야겠다.’
가벼워진 보자기를 고쳐 메며 대학교 쪽을 기웃거리던 참이었다. 건너편 공원에 서있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자신을 보자마자 귀신이라도 본 양 화들짝 놀랐다. 안 그래도 큰 눈을 금방이라도 쏟을 것처럼 뜨고선 무어라 중얼거렸다.
썩 좋은 예감은 들지 않아 바로 고개를 돌렸다. 혹여라도 따라올까 일부러 보폭을 넓혀 겅중겅중 걷기까지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예감은 적중했다. 정녀는 여자가 처음에 중얼거린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꾸만 엄마를 부르며 자신을 뒤좇아왔다. 요즘 세상은 제정신으로 살기 힘든 세상이라 미친 사람도 많으니, 매사에 조심해야 한다던 둘째 언니 말이 불쑥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런 사람들은 한 터럭이라도 관심을 주면 안 되야. 뒤돌아보는 순간 끝이니께 마주치거든 고냥 죽어라 달려라잉. 알겄냐?’
정녀는 본능적으로 사람들이 많은 곳을 찾아 달렸다. 마침 가톨릭 회관 앞에 대학생들이 몰려 있는 게 보였다. 그 속에서 얼핏 첫째 언니를 본 것도 같았다. 언니를 부르려 입을 뗀 순간이었다.
“박정녀!”
누군가 먼저 제 이름을 불렀다. 언니인가? 반사적으로 두리번거려 언니를 찾다가 제 이름을 외친 이가 그 이상한 여자라는 걸 발견했다. 대체 내 이름은 어떻게 안 거지, 목 뒤의 솜털이 쭈뼛 섰다. 하는 수 없이 언니 찾기는 포기하고 인파를 벗어나 골목에 들어와 숨었다.
속으로 삼십까지 세고 이제 갔나 싶어 밖을 살폈다. 여자는 아직도 먼 시야에 있었다. 다만 뭘 골똘히 생각하는지 제자리에 우뚝 멈춰서 있었다. 정녀는 소라고둥에 들어가는 게처럼 다시 고개를 쑥 집어넣고 이번엔 백을 셌다. 구십팔, 구십구, 백.
딱 백을 중얼거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펑 소리가 들렸다. 회관쪽에서였다. 기계적으로 백 이십을 셀 즈음엔 시끄러운 소란이 최루탄 가스와 뒤섞여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정녀는 소매로 코와 입을 막고 골목을 빠져나와 달렸다.
한 오 분을 그리 정신없이 달렸을까. 점퍼 주머니에서 줄곧 들리던 짤랑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퍼뜩 멈춰서 주머니를 휘저으니 잡혀야 할 십 삼원이 없이 휑뎅그렁했다.
‘내 고물값!’
찬바람이 부는 한겨울 이불을 뒤집어쓴 채 둘째 언니에게 듣던 귀신얘기만큼 무서워졌다. 개중에서도 제일 무서운 귀신은 단연 돈귀신이었다. 돈 잡아먹는 귀신만큼 무서운 게 없었다. 돈귀신은 제 양말도, 옷도, 가방도, 책도, 때로는 제 몫의 계란 후라이도 가져갔다.
그런 극악무도한 녀석에게 지금 발목을 붙잡힌 것이었다. 정녀는 황급히 바닥을 훑으며 왔던 길을 되돌아 갔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연기가 자욱하게 깔려가는 마당에 사람들 틈바구니를 뚫고 동전을 찾아 줍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도망치던 한 사내와 부딪쳐 넘어졌다.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바닥을 짚느라 까진 손바닥이 쓰라렸다. 사내는 제가 보이지 않는 양 다른 사람들과 빠르게 지나쳐갔다.
정녀는 따가운 손바닥을 무시하고 흙바닥을 긁어 주먹쥐었다. 분명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일이었다. 이쯤은 손 한 번 탁 털고 일어나면 끝났을 것이다. 정말 그랬는데. 이상하게 서러움이 복받쳐 눈꼬리에 눈물이 찔끔 맺혔다. 정녀는 여전히 땅바닥을 마주본 채 고인 눈물이 점점 더 부풀어오르도록 내버려뒀다. 속눈썹에 걸린 눈물이 막 탈출하기 직전이었다. 돌연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일어나, 얼른.”
고개를 들자 한 청년이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는 단정하게 빗어 내린 검은 머리에 근방에서 본 적 없는 교복차림이었다. 고등학생 정도 되었을까. 정녀는 홀린 듯이 그가 내민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청년은 정녀를 가뿐하게 일으킨 뒤 다른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정녀에게 내밀었다.
“이거 떨어뜨렸더라.”
꼼짝없이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십 삼원이었다. 동전은 정녀의 손아귀로 잘그락거리며 떨어졌다. 정녀는 눈을 꿈뻑거려 동전을 한번 보고, 다시 청년을 한 번 올려다봤다. 나긋한 서울말씨가 듣기 좋았다. 마치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 같았다.
“여긴 위험하니까 최대한 멀리 떨어져. 알았지?”
“저기……!”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그는 뒤돌아 연기가 자욱한 거리를 향해 달려나갔다. 정녀의 고개가 자연스레 그 뒷모습으로 따라 붙었다. 위험하다면서 자기는 왜 그쪽으로 간데. 미처 전하지 못한 말이 묘한 아쉬움과 함께 입안을 맴돌다 비어져 나왔다.
“감사합니다…….”
동전은 손의 열기 때문인지 따듯했다. 정녀는 따듯한 동전을 난로처럼 움켜쥐었다. 고작 쇳덩이에 들러붙은 온기가 뭐라고 조금전까지 서러움으로 메말랐던 마음에도 열꽃이 폈다. 피가 활기차게 도는 심장이 존재를 증명하듯 펄떡였다. 한동안 꿈벅이던 시선은 청년이 남긴 흔적을 주울 것처럼 다시 거리 쪽을 훑었다.
그는 가능한 멀리 떠나라 했지만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괜히 풀린 운동화끈 탓을 하며 쪼그리고 앉아 끈을 맸다. 자연스레 운동화 옆 노란색이 시선을 잡아챘다. 집어보니 누군가의 명찰이었다. 영 생소한 빛깔인 게 이 근방에서 본 적 없는 교복의 것인 듯했다.
정녀는 자수로 새겨진 이름을 손끝으로 한 글자 한 글자 매만져봤다. 신정택. 입안에서도 꼭꼭 씹듯이 발음해봤다. 신, 정, 택. 못난 제 이름과는 달리 술술 굴러가는 게 고급 제과점에서만 판다는 캐러맬 사탕 같았다. 먹어본 적 없어도 아마 꼭 이 이름과 같은 맛이 나리라. 그저 입에 물고만 있어도 혓바닥 뿌리까지 흐르는 단맛.
이런 맛은 오래오래 간직해야 하는 법이었다. 제 보물상자에 넣어두고, 오늘처럼 때때로 눈물이 울컥 차오를 때마다 꺼내 먹으면 달달하게 속을 달래 줄 터였다. 정녀는 십 삼원과 함께 명찰을 보자기에 둘둘 말아 고이 챙겼다. 명찰을 품은 곳이 두 번째 심장처럼 두근거렸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우두커니 서 있을 순 없었다. 때 아니게 젖은 감상을 마침 깨뜨린 건 울음소리였다. 정녀는 퍼뜩 두리번거리다 한 곳을 짙게 응시했다. 울음소리는 잘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골목 구석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난리통에 어딜 다쳤는지, 매운 연기를 잔뜩 들이마시기라도 한 건지. 여자의 곡성은 좀처럼 그칠 줄을 몰랐다. 집으로 향하려던 몸은 하는 수 없이 방향을 틀어 골목을 파고들었다. 이윽고 소리의 근원지 앞에 선 정녀는 조금, 아주 조금 이곳으로 온 걸 후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