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와 품위에 대한 나의 생각
나는 원래 느린 사람이다.
한참을 생각한 뒤에야 대답을 하고 머릿속에서 충분히 정리된 다음에야 행동으로 옮겼다. 그런 나를 보며 답답해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느린 만큼 믿음직했기에 대부분은 나를 이해해 주었다.
그런 내가 변하기 시작한 건 언제였을까. 마음이 작아지고 조급해지기 시작한 건 30대 후반쯤이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친구들과 동료들은 하나둘씩 제자리를 찾아 안정된 궤도에 올라 있었고 언제 그렇게 자리를 잡았는지도 모르게 그들은 삶을 잘 가꾸어가고 있었다.
반면 나는 여전히 방황하고 있었다. 꿈이 뭔지도 모르고 허황된 이야기를 떠들며 방황하던 내가 얼마나 한심하게 보였을까, 후회가 밀려왔다. 그때부터 나는 생각보다 말이 먼저 앞서고 행동이 앞섰다. 생각 없는 행동은 실수를 불러오고 생각 없는 말은 실언이 된다. 이런 조급함은 나의 자격지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고 싶어 하는 유아적인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 그렇게 나는 점점 달라져 갔다. 결국 차분하고 신중했던 나는 덜렁대고 말만 앞세우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성급함은 습관이 되어 나를 지배했다.
왜 내가 이렇게 변했을까
나는 고민했다. 그리고 우연히 생각의 속도와 말의 속도에 대한 글을 읽었다. 그리고 알았다. 나는 생각이 느린 사람이라는 것을. 나에게 필요한 건 나만의 속도를 되찾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몸에 밴 성급함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치앙마이에 도착한 나는 여전히 조급한 사람이었다. 사람들 앞에서도, 식당에서도, 거리에서도 내 마음은 늘 앞서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를 멈추게 하는 경험을 했다. 치앙마이는 신호등이 거의 없는데 님만해민 마야몰 앞에는 큰 사거리가 있고 거기에 신호등이 있다. 마야몰 사거리는 번화가로 도로가 넓고 차량이 많다. 나는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며 계속 두리번거렸다. 체감상 30분은 서 있었던 것 같다. 신호등이 고장 난 건 아닐까 의심했다. 그런데 주변을 보니 다른 사람들은 전혀 초조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묵묵히 기다리며 친구와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나는 몸을 계속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들의 모습을 보고 멈추었다. 오랜만에 가만히 있었다.
신호등이 없는 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부정출발이라도 하려는 육상 선수처럼 한 발을 도로에 들였다 뺐다를 반복했는데 어느 순간 가만히 있었다.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보며, 하늘을 감상하며 기다림 자체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 순간 내 마음도 느긋해졌다.
도무지 고쳐지지 않던 습관인데 치앙마이의 어쩔 수 없는 시스템 덕분에 멈추게 되었다. 신호등은 빨리 바뀌지 않았고 음식이 나오는 데도 한참이 걸리고 종종 잘못 나올 때도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불평하거나 재촉하지 않았다. 그곳의 사람들은 그 시간을 온전히 즐기고 있었다. 그런 모습 속에서 나는 품위와 여유를 배웠다.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치앙마이에서 기억을 곱씹었다. 여전히 내 가슴속에는 언제든 발사할 준비가 된 로켓이 하나 있다. 누군가 버튼을 누르면 즉시 날아갈 기세의 말과 행동 표정이 담겨있다. 하지만 발사되지 않을 것이다.
여유를 잃지 않는 것이야말로 품위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힘들고 불안할 때 조급해지는데 그런 나의 감정을 절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여유와 품위라는 것을.
나는 앞으로 그렇게 여유롭고 품위 있는 사람으로 늙어가고 싶다. 내가 지치더라도 주변의 힘듦을 받아주고 다독여줄 수 있는 진짜 어른으로 말이다.
여유란 나의 불안함을 포용하고
불안 속에서도 중심을 잡는 것.
품위는 그 중심을 지키려는 태도다.